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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3월(三月)

기자명 승한 스님

선사 가슴에 담긴 풍류의 춘정

깨달은 이의 천안이자 예술혼
곳곳의 선적 서정은 가히 일품
대선사 면목도 유감없이 발휘
흔들림 없는 마음 잘 드러나

3월 풍류 빛 거둬둘 곳이 없어
버들가지 끝으로 일시에 흩어지네.
애석히도 봄바람 얼굴은 볼 수 없고
흐르는 물 쫓아가는 붉은 꽃잎만 보네.
三月韶光沒處收(삼월소광몰처수)
一時散在柳梢頭(일시산재류초두)
可憐不見春風面(가련불견춘풍면)
却看殘紅逐水流(각간잔홍축수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8~1163)

3월 햇빛을 ‘풍류 빛’이라 하고, 그 풍류 빛을 ‘거둬둘(모아둘) 곳이 없어’ ‘버들가지 끝에서 일시에 흩어’진다니, 과연 종고는 종고다. 평생을 간화선에 몰두한 종고의 어느 가슴에 이런 풍류의 춘정(春情)이 숨어 있어 춘심(春心)을 뱉어냈을까. 이것만 봐도 선사들의 선심(禪心)은 곧 시심(詩心)이고, 시심은 곧 선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쏟아지는 햇빛을 거둬두지 못해 못내 아쉬운데, 그 햇빛이 버들가지 끝에서 또 한꺼번에 흩어지고 있다니, 이건 이제 선안(禪眼)과 시안(詩眼)을 넘어 한 깨달은 이의 천안(天眼)이자 대 예술가의 혼이다. 

어느 예술가가 있어 햇빛을 모아 둘 생각을 하고, 어느 깨달은 이가 있어 가느다란 버들가지 끝에서 일시에 흩어지는 햇빛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단순히 선(禪)만으로도 안 되고, 시(詩)만으로도 안 된다. 선과 시가 이퀄 관계로 동등하게 결합을 이룰 때, 그때 바로 선시는 하나의 깨달음과 하나의 문학으로 거대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선시가 깨달음을 노래하기 이전에, 매우 높은 문학성(예술성)을 갖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아가 선시가 불멸의 예술과 통찰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3, 4행도 대예술가이자 대선사로서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봄바람’[춘풍(春風)]이 살살 불건만 그 ‘얼굴’[면(面)]은 ‘애석히도’[련(憐)] 볼 수 없다는 이 활유와 환유는 활유와 환유를 넘어 우리 스스로가 그 풍류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풍류에 각자(覺者)와 중생이, 고(高)와 하(下)가 따로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종고 선사의 풍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떨어져 물 위로 흘러가는 붉은 꽃잎을 두고 ‘흐르는 물을 쫓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활유와 환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선사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고, 살아 있는 각자이고 살아 있는 시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봄바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그 바람을 좇아 물을 쫓아가는(흘러가는) 붉은 꽃잎만 보인다는 이 선적(禪的) 서정은 가히 일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근데, 신기하다. 분명 약동을 노래한 것임에도 왜 들뜸이 없을까. 이 선시를 읽고 나면 마음 가득 봄을 안았음에도 외려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은 어떤 연율까. 선시 가득 종고 선사의 무심(無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객관을 객관 그대로 정관(靜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도, 낙화해서 냇물을 쫓아가는 붉은 꽃잎에도, 버들가지 위에서 일시에 흩어지는 풍류 빛에도, 종고 선사의 마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공묘유(眞空妙有)하고 있다. 심안(心眼)으로 그냥 비춰보고만 있다. 근자 들어 문태준 시인이 종고 선사의 그 3월의 심안을 기막히게 잘 이어받고 있다. “얼음덩어리는 물이 되어가네/ 아주아주 얇아지네// 잔물결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나네// 그리고/ 너의// 각막인 풀잎 위로/ 봄은/ 청개구리처럼 뛰어오르네”.(이상 문태준의 ‘삼월’ 전문) 어떤가. 이만하면 ‘3월’에 관한 한 종고 선사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지 않진 않겠는가. 이 선시의 원제목이 ‘시로 제자들에게 보였다’는 의미로 ‘시도(示徒)’였기 때문이다. 3월(봄)이 와서 조금은 들뜬 제자들에게 종고 선사는 “춘경(春景)을 보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봐야 한다”고 점잖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대혜종고는 되지 말자. 무리[도(徒)]는 되지 말자. 그냥 얼음덩어리 녹듯 얇게 얇게 젖어만 들자. 이 선시를 읽는 우리가 바로 종고의 춘정(춘경)이지 않은가.

승한 스님 빠리사선원장 omubuddha@hanmail.net

[1672호 / 2023년 3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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