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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에 관한 단상-2

무여열반 아니라면 어느 때라도 다시 깨어난다

깊은 잠·의식불명·무상정·멸진정·무상천 등은 죽음 형제들
얼음물 속 물고기나 땅속 벌레가 겨울잠 자는 것과 비슷
무여열반에서만 모든 識이 소멸해 다시 깨어나는 일 없어

‘유가론’에서 죽음이란 목숨 끊길 때 의식이 소멸하는 한 찰나를 가리킨다. 사진은 아잔타석굴 26굴의 열반상. [법보신문DB]
‘유가론’에서 죽음이란 목숨 끊길 때 의식이 소멸하는 한 찰나를 가리킨다. 사진은 아잔타석굴 26굴의 열반상. [법보신문DB]

내가 이전에 ‘천상의 책’이라 불렀던 ‘유가사지론’(이하 ‘유가론’) 곳곳에는 죽음과 연관된 은밀한 내용이 많이 흩어져 있다. 다 읽어 보진 못했지만, 이 책에서 죽음의 공포를 걷어 내고 천상으로 이끌 감동적 문구를 찾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필시 도중에 길을 잃고 어리둥절할 때까지 냉정한 분석만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해보니, 내가 무심코 나섰던 정신적 사냥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던 것 같다. 이전의 그 염세주의 철학자와 기괴한 문학가의 행적을 돌아보면, 모두 죽음의 형제와 친해진 후에 죽음의 심연으로 들어간 듯하다. 죽음의 형제란 그 철학자가 죽음과 닮은 것이라 여겼던 일상의 경험, 즉 잠과 실심(失心: 의식불명)이다. 죽음의 심연이란 그 문학가가 무모하게 들여다보려 했던 금기의 영역, 즉 목숨을 마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런 주제라면 미륵의 후예들이 곧장 달려들어 ‘당신이 생각한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분석할 것이다.
‘유가론’(‘의지’)에서 죽음은 의식의 작용 중 하나로 다루어진다. 의식이 하는 일이란 무엇을 분별하고, 취하거나 미치기도 하며, 꿈꾸거나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도 하고, 내지는 마지막에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해서,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질 때 의식이 소멸하는 한 찰나를 가리킨다. 그 염세주의 철학자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죽음이란 주관적으로 뇌수의 활동이 중단되어 의식이 소멸하는 한순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사유(死有)’라고 한다. 문자로만 보면, 죽음은 무(無)가 아니다. 그 특이점이 만들어진 그 자리에서 곧장 신통한 유령인 중유(中有)가 태어나서, 미래의 자기를 어슴푸레 닮은 꼴로 떠돌다가, 일곱 번의 7일이 다하기 전에 서둘러 다음 생을 찾아간다. 미륵의 후예들은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지만, 나의 상상을 조금 멀리 이끌고 간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유가론’(‘유심무심2지’)에서 설한 육무심위(六無心位)로, 의식이 소멸한 상태라는 점에서 죽음의 형제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순으로 열거해보면, 무심(無心)의 수면(睡眠)과 민절(悶絶: 의식불명),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과 무상천(無想天), 그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앞의 둘은 일상의 산란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무겁고 혼미해지다가 의식이 소멸하는 것이다. 이중, 무심의 수면이란 극심한 피로 등으로 꿈 없는 깊은 잠에 빠진 것이고, 무심의 민절이란 풍·열이나 약물 혹은 급소의 타격 등으로 의식을 잃는 것이다. 옛 주석가들은 “죽음은 극심한 민절에 속한다”고 하였다. 다음의 셋은 어떤 선정의 힘으로 인해 무의식 상태가 되는 것이다. 범부가 거친 상념을 떠나려는 생각에 집중해서 색계의 무상정에 들었을 때, 성자가 미세한 상념을 그치려는 생각에 집중해서 무색계의 멸진정에 들었을 때, 마음도 물질도 아닌 제3의 강력한 힘이 모든 마음의 활동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범부가 저 무상정을 닦아서 그 과보로 무상천에 태어나면 그곳에서도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옛 주석서에 따르면, 이러한 무심의 상태는 마치 얼음물 속의 물고기나 땅속의 벌레가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다. 여섯 번째 무여열반이란 모든 번뇌를 끊은 성자가 남은 육체마저 소멸시키고 완전한 죽음에 든 것이다. 그 논에서 스스로 말했듯, 이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무심이다. 오직 이 경우에만 모든 식(識)이 완전히 소멸하여 다시 깨어나는 일은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도들은 마지막 무여열반만을 유일한 진실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무여열반은 모든 말장난[戱論]이 그친 세계라고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 속에 알맹이가 들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으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우선, 서로 닮은 죽음의 형제이면서도 앞의 다섯이 마지막 무여열반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다시 깨어난다’는 것이다. 무심의 상태에서는 깨어나려 애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에도 그로부터 불가사의하게 다시 깨어난다. 아마도 무심정에 들기 전에 스스로 언제쯤 나오겠다고 기약했기 때문이거나, 혹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잠들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죽음의 형제가 진정 그러한데, 죽음도 그러하지 않을까. 의식불명[悶絶]이 깊어져 목숨이 끊어질 때, 지극히 혼미한 가운데서도 맹목적인 자기애[我愛: 潤生愛]가 일어났기 때문에 다시 깨어나서, 이제는 유령으로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무심의 상태에서도 마치 폭류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심층의 식(識)이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매우 꺼리시면서도 조심스레 그 이름은 ‘아타나식’이라고 알려주셨다. 그것은 또한 ‘아뢰야식’이라고도 하며, 성자의 완전한 죽음에서만 영원히 소멸한다.

이쯤에서 저 기발한 임종 최면을 상상했던 문학가가 솔깃해할 만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옛 불교 문헌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한 비구가 멸진정에 들기 직전에 스스로 이렇게 기약하였다. ‘건치(健稚: 때를 알리는 종)가 울리면 그때 선정에서 나오리라.’ 이미 멸진정에 들었을 때, 마침 승방에 불이 났다. 다들 황급히 떠나면서 건치를 치지 않고 가버렸다. 12년의 세월이 지났다. 신도와 승려가 다시 모여 승방을 일으키고자 해서 건치를 두드렸다. 그 비구는 건치 소리를 듣자 멸진정에서 깨어났고, 곧장 몸이 산산이 흩어져 죽었다.’ 이 일화는 우리가 무심으로는 죽을 수 없고 오직 유심으로만 죽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무심의 선정에 묶여 있으면 죽음은 계속 지연된다. 설사 극심한 의식불명, 즉 죽음의 근처에 이르렀어도 죽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생각이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본래 몸의 죽음이 아닌 의식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내가 사실 죽음 자체보다는 나의 마지막 한 생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철학자와 문학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과 친해졌으니,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 민낯을 두려움 없이 마주했을 것이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한 대학의 정문 앞에서 둔중한 물체에 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져서도 ‘내일 시청 앞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죽은 한 젊은이를 잊지 못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기왕이면 내가 세계의 수수께끼를 쫓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그러나 마지막에 어떤 한 생각이 떠올랐든 그것 또한 허망한 것이며, 근원적으로 우리는 그것과는 다른 무엇이리라. 그것에 대해 많이 말하는 것은, 부처님도 우려하셨듯, 그의 울타리를 벗어나 우리를 너무 먼 데로 이끌고 갈 것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673호 / 2023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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