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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부처님 지혜문에 들어 있다

기자명 혜민 스님

7. 지혜문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

지혜문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또다른 문 찾아서 어려울 뿐
불법은 형상이 없는 지혜로써
눈높이 맞는 방편‧비유로 전해

이번 3월에는 ‘법화경’의 ‘방편품’ 독송을 고담선원 신도님들과 열심히 하고 있다. 매달 한품씩 바꿔가면서 하는 기도를 혼자 해왔다면 분명 중간 중간 나태한 마음을 낼 수도 있었을텐데, 지난 7년간 신도님들이 함께 하셔서 독송 기도를 꾸준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그 분들이 바로 나의 스승이자, 신심의 나무가 계속해서 자랄 수 있게 보호해 주는 호법 신장님들이시다.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불법을 잊지 않고 함께하는 신도님께 항상 감사한 마음이 든다. 

‘방편품’ 맨 앞장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이 없으며,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들이 알 수 없느니라”라는 부분이 나온다. 내가 대학생 때 처음 이 부분을 독송했을 때는 그냥 막연하게 부처님의 지혜는 엄청나서 아무리 많은 것을 깨달은 성문이나 벽지불 제자들도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나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가까워진 지금 시점, 다시 이 구절을 보니 좀 더 깊은 뜻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하다. 우리가 부처님 지혜문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그 문을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고, 바로 우리 모두가 이미 그 문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또 다른 어떤 문을 찾아서 들어가려고 하니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는가. 서울시청 앞 한 가운데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문을 찾으려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많은 중생들은 그 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열심히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찾으려는 노력이 쉬지 않는 한 그 문안으로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다른 말로하면 부처님은 일체의 노력이 완벽하게 쉰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일체의 노력이 다 쉬어야지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걸까? 보통 노력한다하면 좋은 의미 아니인가? 어째서 노력을 하면 할수록 부처님 지혜문에 들어가는 것은 머나먼 일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노력을 한다는 것은 지금은 아직 아니라는 느낌,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자꾸 하는 것이다. 즉, 지금 현재를 미묘하게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는 상태가 노력이다. 저항을 하면서 마음속에 그려놓은 어떤 미래 목표의 이미지, 성불에 대한 상(相)에 집착하면서 그곳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결국 노력의 마음 상태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 가운데 집제(集諦)에 해당한다. 그 목표가 아무리 숭고한 성불이라고 해도 그것을 대상화해서 갈망하면서 구하고 있으면 해탈하고는 멀고도 먼 망집(妄執)의 상태이다. 

더불어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이 없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분명히 ‘방편품’에서 말씀하셨다. 그 뜻은 무엇인가? 어째서 이해하기 어렵다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 속에는 대상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로 말하면 그 지혜는 아무런 모양이 없는 텅 빈 맑은 파란 하늘과도 같아서 그 안에는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예 없는 것이다. 텅 빈 하늘 안에 예를 들어 코끼리나 하트 모양의 구름이라도 지나가야 그 구름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이해할 것이 생기지만, 그 어떤 구름조차도 없는 투명하게 텅 빈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에 이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부처님 지혜가 한량없다는 표현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한계가 없이 무량하다는 것은 아무리 엄청나게 크고 많은 것이라 해도 결국 한계가 있는 것이 되기에 무량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한량없는 것이 되려면 부처님 지혜가 어떠한 모양으로 규정돼있지 않아야 한다. 즉 마치 일체의 소리가 없는 고요한 무형상의 침묵과도 같지만 그 침묵이 살아서 그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에 딱 맞는 방편과 비유로써 가르침을 주어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이다. 

만약 부처님 지혜가 일정하게 정해진 모습이 있었다면 분명 그 모습으로만 부처님 법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혜는 독단적인 교조주의(dogmatism)의 여타 종교들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위대하고 ‘법화경’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이처럼 무형상의 살아있는 지혜로써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 눈높이에 딱 맞는 방편과 비유로 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674호 / 2023년 3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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