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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학들 롤모델 된 은둔 고수의 보석 같은 논문집

  • 교계
  • 입력 2023.04.28 14:09
  • 수정 2023.05.01 15:09
  • 호수 1679
  • 댓글 4

초기·부파불교연구
법경(서성원) 지음 / 오타쿠 / 274쪽 / 2만3000원

1987년 파리대학에서 박사
논문 8편·수필 1편 등 수록
치밀한 분석으로 내용 전개
엄격한 텍스트 비평도 특징

동국대 전 교수 법경 스님.
동국대 전 교수 법경 스님.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아니다. 한 모금 바닷물로도 충분하다. 학계에선 은둔 고수로 법경(서성원) 스님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1988년 3월부터 2004년 2월까지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집필한 논문들은 후학들에게는 전범(典範)이었다. 어린왕자를 떠올릴 만큼 해맑고 자비로웠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지독하리만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방식을 지향했다. 주제가 정해지면 관련 경문의 판본들을 모두 취합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냈다. 엄격한 텍스트 비평에 근거해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논지를 전개했기에 어설픈 추측이나 얼버무림이 설 자리는 없다.

스님의 학문 방법론은 전통과 서구를 관통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학사(1969)와 석사(1971) 과정을 마친 다음해인 1972년 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불교전통은 동양에서 이어지지만 불교학 연구의 중심은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에는 동국대 WISE캠퍼스에서 교수를 지낸 호진 스님도 함께 했다.

현지 언어에 밝지 못하고 곤궁한 처지였기에 고생은 필연적이었다. 처음엔 수도원에 머무르며 공부를 시작해 나중에는 프랑스 명문대학인 파리 제4대학(소르본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흔한 여행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숙소와 도서관을 오가며 책과 씨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불교학 대가들 지도로 연구·토론할 수 있었고 1987년 마침내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제목은 ‘4아함의 맥락에서 본 마라 연구’였다.

귀국 후 스님은 모교 강단에 섰다. 그러나 오랜 유학생활로 건강이 크게 훼손되고 나중에는 위암까지 앓아야 했다. 강의와 대학원생 지도는 이어갈 수 있었지만 글 쓰는 일은 버거웠다. 오랜 교수 생활에도 논문이 많지 않은 이유다. 2004년 정년퇴임 무렵 제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논문들을 찾아 엮었다. 학문적 가치가 높은 보석 같은 논문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한정판 ‘초기·부파불교연구’라는 제목의 논문모음집이 발간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또한 구할 수 없게 되면서 후학들의 아쉬움은 커져갔다.

이번에 출간된 ‘초기·부파불교연구’는 당시 책을 근간으로 하되 표기, 편집, 장정 등을 대폭 수정·보완했다. 본문의 한자를 모두 한글로 바꾸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한글을 병기했다. 종이책과 함께 전자책으로도 발간했다.

책에는 △‘잡아함’에 나타난 바차고뜨라(vatsagotra)의 질문 △밧치뿌뜨리야(Vātsīputrīya) 학파의 출현과 그 배경 △‘마녀경(魔女經)’과 삿따바싸니-디따로(Sattavassāni-Dhītaro)에 대하여 △‘파다나숫따(Padhānasutta)와 증일아함의 항마전설’ △‘제일의공경’과 바수반두 △‘구사론’과 ‘성업론’을 통해서 본 종자설 △부파불교에 있어서 존재론 △‘대지도론’의 사실단 등 논문 8편과 수필 ‘프랑스 유학기-촌닭 파리에 가다’가 수록됐다.

2018년 법경 스님이 팔순을 맞아 제자들이 함께했다.
2018년 법경 스님이 팔순을 맞아 제자들이 함께했다.

스님의 지도제자인 김성철 동국대 명예교수가 이들 논문을 일컬어 ‘텍스트 비평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연구방식’이라고 평가했듯 연구방법론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논문 자체도 매우 흥미롭다. ‘잡아함에 나타난 바차고뜨라의 질문’은 불교철학의 오랜 관심사이자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붓다 자신이 해명하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무기(無己)’를 다루고 있다. 각 경전에서 무기가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문헌학적으로 다루고 ‘불의 소멸 및 심해(深海)’의 비유를 들어 붓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또 붓다의 성도과정 중 방해자로 등장하는 ‘마라(Māra)’ 관련 팔리어본과 한역본의 텍스트 비평을 통해 그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구명한다. 특히 일반적인 선입견과 달리 원형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한역본이며, 팔리어본은 후대 어느 시점에 수정 내지 첨가됐음을 밝힌 점도 흥미롭다. 스님이 은둔의 고수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679호 / 2023년 5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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