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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 만큼 중요한 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 입니다” 

  • 무진등
  • 입력 2023.05.15 15:47
  • 수정 2023.05.23 10:26
  • 호수 1681
  • 댓글 4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교수

독실한 기독교 집안서 태어나 사찰 문간도 안 밟아…서울대병원 정년 후 춘천 감주사로 이사
한국여자의사회 문화유산 답사하며 불교에 호기심…2010년 창립한 무량감로회 초대회장도
“부처님 만나지 못했다면 눈에 보이는 상처만 치료하는 의사였을 것…자비의 중요성 절감”

새벽 6시11분 남춘천역에서 ITX-청춘 첫 기차를 탄다. 7시33분 용산역에 도착.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9호선을 갈아타고 흑석역에 하차. 중앙대병원에 도착하면 딱 아침 8시. 환자들을 마주할 책상에 앉아 합장한 채 말한다.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처님!”

박귀원 중앙대병원 소아외과 임상석좌교수(74)가 사는 곳은 화려하고 세련된 아파트가 아니다. 강원도 시골 한 사찰이다. 2014년 2월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임한 뒤 비구니 시목 스님과 감주사에서 살고자 들어왔다. 하지만 1년 선배인 김성덕 전 중앙대병원 의료원장의 부탁으로 퇴임 다음달인 3월부터 다시 10년째 출퇴근 중이다. 춘천과 서울을 오가는 일상이 힘들고 불편하진 않냐고 묻자 ‘오히려 좋다’하며 방긋 웃는 박 교수.

“서울에 살 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도 차를 탔어요. 춘천에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다보니 자연히 하루에 만 보씩 걷게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도 할 수 있고요. 기차 타면서는 눈을 감고 호흡해요. 명상 시간을 버는 셈이죠. 감주사가 제 건강 비결이랍니다. (하하)”

박귀원 교수가 환자 진료를 보는 책상에 앉아 있다.

소박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사실 그는 현대 의학사에 기록될 역사적인 인물이다. 서울대 의대 외과 여성 1호이자 우리나라 소아외과 분야 첫 여성 전문의. 1970년대만 해도 남성들 영역이었던 외과 영역에 도전해 소아외과학의 국내 최고 권위자가 됐다.

당시 국내엔 소아외과학이 알려지지 않았다. 1978년 소아외과 전문의로 미국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은사 김우기 교수의 권유로 소아외과를 선택, 불모지나 다름없던 소아외과에 ‘올인’했다. 1978년 서울대병원에 소아외과가 처음 생긴 뒤, 1978년 9월부터 전임의(펠로)로 시작해 40여년간 3만여 건 넘는 수술을 집도했다. 1년에 많게는 1200건, 적게는 600건을 수술했다고. 소아외과학의 정체성을 찾고자 주력한 그의 열정은 1985년 대한소아외과학회 창립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수술복을 입은 박귀원 교수.

박 교수는 고난도 소아 수술의 세계적 명의다. 소아외과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선천성 기형 수술 일인자로, 동료 의사와 환자들 사이에서도 ‘신의 손’이라 불린다. 김성덕 전 의료원장은 2020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귀원 교수가 수술하는 걸 보면 신기(神技)라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소아 탈장(脫腸)의 경우 절개 부위가 워낙 작아 손을 넣어 수술할 수 없다. 아주 가느다란 핀셋을 이용해 탈출한 장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 수술을 완료하는 데 일반적으로 1~2시간 걸린다. 박 교수는 9분이면 끝난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그분이 수술하는 걸 수십 년 보고도 아직도 모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외과를 지망할 때 난관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위원회에서 까다로운 심사를 했고, 특히 외과 과장(진병호 교수)이 급환으로 별세해 의국장(김진복 교수)의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모두가 그의 선택을 만류했다. 서울대 외과 교수였던 부친은 더 심했다. ‘누가 여자에게 수술을 받겠는가? 당직실 숙박이 가능하겠느냐’ 등등이 이유였다.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도 “산부인과도 외과분야니 산부인과가 어떻겠느냐”는 중재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박 교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박 교수는 넷째 딸이다. 부친은 대장항문 분야의 개척자인 박길수 교수(서울대 의대)다. 큰 언니는 고려대 의대, 둘째 언니는 서울대 치대, 셋째 언니는 서울대 의대를 나왔다. 집안 식구가 다 의료계로 나갔다. 하지만 박 교수는 정작 의대에 갈 마음이 없었다. 법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법대에 가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는 압박에 결국 의대에 입학했다. 본과 1학년 때까지는 후회했다. 하지만 2~3학년 때 임상하다 보니 ‘남을 위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저 이전에는 서울대병원 외과에 여의사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러니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하셨겠죠. 그러나 여자가 외과를 못 할 이유가 있나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의사라는 이유로 (담당의사를) 바꿔 달라는 환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환자에게 ‘여자가 수술하는 게 겁 안 나느냐’고 하면 ‘바느질을 더 잘하지 않느냐’는 말이 돌아올 정도였다니까요. 힘들 때가 많았지만 그런 말들이 큰 힘이 됐어요.”

박 교수는 여전히 월·화·수에 외래를, 목·금에 수술한다. 응급환자가 있으면 요일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바쁜 일상 중에도 신행 생활을 놓치지 않는다. 불자 의료봉사단체 ‘무량감로회’에서 매주 둘째주 일요일에 조계사 어르신 의료봉사를 한다. 이외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찾아가는 의료 지원’ 사업을 벌이며 취약계층 보건 의료에 힘쓰고 있다. 라오스·네팔 등 의료 소외국가에서 해외 의료봉사도 연 1회 꾸준히 전개한다. 지난 10년간 무료 진료한 환자 수만 3만 명이 넘는다.

박 교수에 따르면 13년 전 창립한 무량감로회 전신은 약사들의 의료봉사 단체 ‘불자약사보리회’이다. 1998년 소외된 노인을 돕자는 뜻을 모아 약사들이 결성한 불자약사보리회는 종로 탑골공원과 서대문구 독립문, 서울역에서 간단한 진단과 무료 투약 봉사를 해왔다. 하지만 2001년 의약분업이 실시되며 약사들의 처방이 금지됐다. 이발 봉사와 식사 제공 등을 진행하는 등 다른 봉사활동으로 전환하고자 했지만 의료 봉사가 중단되며 사실상 해체 단계를 밟게 됐다. 이에 2009년 말부터 불자의사들이 약사보리회에 참여하며 활동이 재개됐다. 그 모임이 ‘무량감로회’가 됐다. 무량감로회는 이듬해인 2010년 1월24일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법당에서 정식으로 창립 법회를 열었다. 박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김종화 한국불교연구원 이사장, 불자약사보리회 안기순, 나청자 약사, 배광식 서울치대 교수, 강영자 서울대병원 간호사, 채원선 자원봉사자 대표 등을 주축으로 조직이 꾸려졌다. ‘무량감로회’라는 명칭은 조계종 전 원로의원이었던 인환 스님(1931~2018)이 지었다.
 

2016년 무량감로회 창립6주년 기념식에서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2016년 무량감로회 창립6주년 기념식에서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이렇듯 ‘모태불자’ 포스를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 박 교수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찰에는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는 외할머니 당부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 불국사에서도 사찰 문간을 넘지 않았다. 입구에서 쭈뼛거리던 그를 보곤 담임선생님은 “국보 보러 경주까지 와서 왜 들어가질 않니”하며 의아해했다고. 친가도 외가도 모두 개신교 신자다 보니 불교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마주한 불교는 수능 무렵 TV에 나오는 풍광이 다였다. 학부모가 법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며 ‘아, 불교는 기복신앙이구나’ 했다. 하지만 2006년 한국여자의사회 신임회장을 맡으면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 박 교수 삶에 불연(佛緣)이 스며들었다. 

“의사회 내에 ‘문화유산사랑회’라는 답사동아리가 있었어요. 이 동아리에서 주로 사찰을 다녔어요. 제가 회장을 맡고 있으니까 참여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선배들이 사찰 창건기와 보물·국보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를 전해줬는데 참 재밌더라고요. 자연히 호기심이 생겼고 들은 게 있으니 절에 들어가 직접 곳곳을 확인하고 싶어졌어요. 부끄럽지만 그제야 부처님이 석가모니불 한 분만 있던 게 아니구었나 했답니다.”

한 번 일어난 호기심은 교리 공부로 이어졌다. 이 무렵 지광 스님이 지도하는 능인선원 기초교리반에 인연이 돼 등록했다. 가장 바쁠 시기였지만 매주 수·금요일 오후 7시부터 두 시간씩 빼놓지 않고 강의를 들었다. ‘아! 불교는 기복 신앙이 아니라 일상 속 지혜였구나.’ 평생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 순간들이었다. 능인선원을 졸업하고 한 지인의 소개로 남양주 보광사 정인 스님을 만났다. 또 보광사와 20분 거리의 절에 살던 비구니 스님과 인연이 됐다. 그 스님이 바로 여생의 동반자가 된 시목 스님이다. 시목 스님과는 첫 만남 때부터 참 편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사찰을 찾아가는 게, 2주에 한 번이 됐다. 사찰을 찾아가는 횟수가 잦아지자 박 교수가 “스님, 제가 모시고 살겠다”고 선언했다. 시목 스님도 동의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교수라면 환영이에요.”

그는 아이들을 돌보는 병원을 떠나면 춘천에 어르신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할 생각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맡았던 무량감로회 회장직도 최근 넘겼다. 하지만 활동은 계속할 생각이다. 

“제가 사실 특별한 재능은 없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있잖아요. 의사가 가진 사회적 직위 덕분에 이번 생 과분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가피를 입은 만큼 여생은 베풀고 살아야죠. 조계사에 찾아온 어르신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로워서 오시는 것 같아요.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말동무가 필요하신 거겠죠. 처방만큼 중요한 게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요. ‘아주 편찮으셨겠다’ ‘고생하셨다’하고 손 잡아드리면 찌푸리고 들어오셨어도 금세 방긋 웃으며 돌아가세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게 감사하죠. 제가 최선을 다하게끔 도와주는 그분들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2019년 12월 한국불교연구원 무량감로회가 서울시의사회로부터 제18회 한미참의료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당시 무량감로회장이었던 박귀원 교수가 단체를 대표해 상패와 상금1500만원을 받았다. 
2019년 12월 한국불교연구원 무량감로회가 서울시의사회로부터 제18회 한미참의료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당시 무량감로회장이었던 박귀원 교수가 단체를 대표해 상패와 상금1500만원을 받았다. 

박 교수는 만약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눈에 보이는 상처만을 기계적으로 치료하는 의술이 있는 의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인간의 심신이 유기적 관계에 있고 이를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해야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오늘도 그는 씩씩하게 사찰 문을 나서 용산행 첫 기차에 몸을 싣는다. 환자들을 마주할 책상에 앉는다.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눈을 감고 서원한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자비심”이라고 볼웃음 짓는 그에서 약사여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81호 / 2023년 5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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