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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유행하지 않는다

  • 법보시론
  • 입력 2023.06.12 14:19
  • 수정 2023.07.10 11:00
  • 호수 1684
  • 댓글 2

수십 년째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경구가 있다. 진리는 유행하지 않는다. 참 억울한 말이다. 진리가 거짓의 뿌리를 단박에 잘라낼 수 있는 마법의 칼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진리는 결코 유행 따위는 하지 않는다. 유행하는 모든 것은 진리일 수 없다. 진리는 절대 유행할 수 없다. 다만 유행하는 상상의 세상을 그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진리 없는 세상에서 지지치 않고 진리를 상상하는 힘, 이것이 진리의 존재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행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세속적 승리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보증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성공은 존재력을 살찌우고 실패는 존재를 부정한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적인 점령 공간의 확장, 통계적 신도수의 증가, 정치적 호명 순서가 마치 종교적 진리를 보증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성공한 종교가 있고 실패한 종교가 있다. 심지어 우리는 통계를 통해 종교의 생명력을 수치화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종교, 성공한 종교는 그 이유를 ‘종교적인 진리’에서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진리는 생존을 보증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조선의 종교와 향사 일람’이라는 책자를 발행한다. 여기에는 1915년 10월 포교규칙이 시행된 이후 각 종교의 통계 자료가 실려 있다. 통계가 정확한 현실을 반영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통계가 그리는 종교의 생명 곡선 앞에서 그저 진리를 되뇌일 수 없다.

조선불교의 신도수는 1915년 5만7023명에서 1924년 20만3533명으로 계속 증가한다. 그리고 1925년 19만8177명에서 1932년 11만8525명까지 급감하는 시기를 거쳐 다시 1933년 12만8048명에서 1937년 19만4177명으로 불과 5년만에 급증세를 보인다. 1924년까지 신도수가 급증한 것은 기존에는 누락된 신도수가 통계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25~1932년까지의 급감과 1933~1937년까지의 급증에 대해서는 다른 분석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기독교 신도수는 1915년 26만7484명에서 1922년 37만3092명으로 급증한다. 그리고 1923년 36만4252명에서 1928년 28만6249명으로 조금 주춤하다가 1929년 31만2645명에서 1937년 49만9323명으로 다시 가파르게 증가한다. 조선인 천주교 신자만 놓고 보면 1916년 8만3893명, 1926년 8만9400명으로 큰 변화가 없다가 1927년에 4만8760명으로 급감하고, 1928년 5만6026명에서 1937년 11만2610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조선인 신자수는 1916년 12만4170명이었다가 1922년 19만4037명까지 증가한다. 그리고 1923년부터 감소하여 1926년 12만3730명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1927년 14만4898명에서 1937년 28만7082명으로 두 배의 성장률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1920년대 중반까지 모든 종교의 신도수는 대체로 격증한다. 그리고 1925년에서 1930년 무렵까지는 신도수가 급감하다가 다시 1930년대에는 1937년까지 급증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러한 통계가 어느 정도 종교의 심전도(心電圖)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종교는 일제강점기를 종교적인 고난의 시기로 묘사한다. 그러나 통계는 이 시기가 종교적인 급성장의 시기였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이것을 진리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세밀한 묘사와 설명 없이 단 하나의 해석 틀로 각 종교의 생명 그래프를 재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한국종교가 다종교가 공존하는 독특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기만적인 해석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곤 했다. 그 결과 현재 우리의 종교는 ‘기성품 진리’와 ‘재고품 진리’를 판매할 뿐 더 이상 진리를 창작하며 진리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리는 생존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이창익 교수 changyick@gmail.com

[1684호 / 2023년 6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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