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교는 사라지고 전쟁만 남았다

기자명 이창익
  • 법보시론
  • 입력 2023.10.16 14:52
  • 수정 2023.10.29 07:29
  • 호수 1700
  • 댓글 0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경이 그어진 가자지구를 둘러싸고 연일 수백의 인명이 살상되고 있다. 종교에서 시작된 전쟁이지만 이제는 전쟁을 묘사하는 신문기사에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테러나 자살폭격을 묘사할 때는 이 잔혹하고 기이한 파괴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호소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종교를 등장시키면 불가사의한 일도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전의 동기와 목적이 명확한 전쟁을 이야기할 때 ‘종교’라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현상에 대한 몰이해가 증폭되기도 한다.

2014년 7월과 8월에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으로 50일 동안 교전이 벌어졌고 팔레스타인에서 2000여명, 이스라엘 측에서 70여명이 살상되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이 지역의 살상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자지구는 2007년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한 축인 하마스가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철수와 함께 전면 봉쇄되기 시작했다. 봉쇄는 공중, 지상, 지하, 해상의 모든 영역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방벽 밑으로 밀입국용 땅굴을 뚫으면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땅굴을 매몰하거나 땅굴에 물을 채웠고, 이제는 아예 지하까지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가자지구의 땅굴은 더욱 많아지고 더욱 깊어져서 이제 이곳은 땅굴의 도시가 되었다.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정말 완벽한 차단과 고립의 장소가 바로 가자지구다.  가자지구는 21세기에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큰 옥외 감옥’이자 한 민족이 다른 민족 200만명 이상을 고립지에 가둔 희대의 ‘민족 포로수용소’다. 

20세기에 포로수용소에 갇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21세기에는 거꾸로 타 민족을 그것도 지상 최대의 옥외 감옥에 가둬두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삶이 어떠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테러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완전한 물질적인 환경이 구축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또 다른 축인 파타가 통치하는 서안지구 즉 웨스트뱅크에는 총 230개의 이스라엘 정착촌들 사이에 마치 땅 위에 있는 섬들처럼 총 165개의 팔레스타인 위요지가 섞여 있다. 그래서 서안지구는 지상의 섬들을 연결하는 산산조각 난 상상의 국가를 품고 있다. 이 섬들은 섬들 사이에 땅을 채워 언젠가는 하나가 될 것을 꿈꾸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는 가자지구라는 지상 최대의 완벽한 옥외 감옥과 국가를 꿈꾸는 서안지구의 섬들로 구성된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잠재적인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2020년 1월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기묘한 국가 형태의 유지를 전제한 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연결하는 40km의 지하 터널을 뚫어 고속철도를 놓는 중동평화안을 발표하여 조롱을 받기도 했다.

가자지구에는 지금껏 세상의 종교가 말했던 사랑과 자비도, 철학자들이 설파한 이성과 도덕도 온데간데없다. 종교에서 시작된 분리와 배제와 고립은 이제 서로를 악마화하는 전쟁의 자리에서 절정을 누리고 있다. 이 전쟁을 묘사하는 언어에서 종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종교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배제, 고립, 몰살을 낳는 가장 극악하고 완전한 전쟁으로 진화하고 변신해 버린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성스러움이 휘두르는 절대적인 힘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일에 온 인생을 바친 사람조차도 자신의 언어를 낳은 그 부정의 자리만은 기어코 성스럽다고 여기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자신 안에서 돋아나는 희미한 성스러움조차 의심하지 않는 인간은 늘 그런 성스러움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악마를 만드는 정신이 바로 진짜 악마이기 때문이다.

이창익 교수 changyick@gmail.com

[1700호 / 2023년 10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