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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 법보시론
  • 입력 2023.08.14 14:05
  • 수정 2023.08.24 12:20
  • 호수 1692
  • 댓글 0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이자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작품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 이 작품에는 흔한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이자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작품 대표작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 이 작품에는 흔한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가 1929년에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것은 담배 파이프를 그린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를 기입하면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여기서 마그리트는 그림과 사물을 혼동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을 풍자하고 있다. 파이프 그림으로 담배를 피울 수는 없지 않은가?

요즘 들어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최근에 카이스트의 명상과학연구소를 두고 과학이 불교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표출된 적이 있다. 이때 우리는 “명상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명상은 종교 안에서 자란 과학이지만 종교적인 환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왜 우리는 자꾸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고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명상하는 사람의 뇌파나 호르몬의 변화를 측정해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개선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과학적인 명상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상의 표준화 작업은 유익한 효과를 검증할 수 없는 비과학적 명상의 퇴출로 이어질 것이다. 과학적인 검증 마크가 붙은 명상과 그렇지 않은 명상이 존재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이다. 결국 다시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진짜 종교와 가짜 종교의 이분법으로 회귀하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이 논란의 중심에 섰던 대구시립합창단의 종교 편향 논란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도 “예술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클래식에 대한 불교계의 몰이해가 언론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교향곡보다는 사실 국립과 시립 합창단이 즐겨 부르는 미사곡, 수난곡, 오라토리오 등의 코랄이 갖는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 좀 더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이 자극하는 종교적 모호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음악이나 악기에 대해 너그럽지 않았다. 악기는 춤이나 주술과 연결되기 쉽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금관 악기나 케틀드럼 사용에 반대했고, 말씀을 집어 삼키는 화려한 음악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배에서 악기는 배제되었고 무반주 단선율의 그레고리오 성가만 겨우 허용되었다. 

심지어 아타나시우스는 노래조차 싫어해서 낭독 형식의 가창만을 선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교회 음악을 허용했다. 종교 개혁 당시 청교도들은 성당의 오르간이나 악기를 파괴할 정도로 음악에 적대적이었다. 칼뱅도 악기 반주에 반대했고 목소리로만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츠빙글리는 그레고리오 성가조차 반대했다. ‘악마의 트럼펫’인 오르간이 교회 안에서 허용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역사는 비음악적이었다. 찬송가를 제외한 음악이 말씀의 선포에 적합한지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바흐나 베토벤의 화려한 미사곡은 결코 교회 예배에 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교회가 문제였다. 결국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미사곡, 수난곡, 오라토리오는 교회 밖에서 클래식 음악이 되었다. 따라서 바흐, 헨델, 베토벤 등의 음악은 종교 밖에 존재하는 종교 음악이라는 기묘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바흐의 미사곡 B단조의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자비를 베푸소서)’을 들으면서 누가 이것을 비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서 ‘할렐루야(여호와를 찬미하라)’는 그저 비종교적인 감탄사라고 말한다면 누가 이것을 믿겠는가?

파이프 그림으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그러나 파이프 그림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종교적이지 않아서 종교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처럼 악기처럼 오히려 지나치게 종교적이어서 종교 밖에 존재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이창익 교수 changyick@gmail.com

[1692호 / 2023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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