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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종교, 그러나 엷은 종교

나는 가끔 종교란 아무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책, 아니 아무도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책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종교는 완전한 독서를 거부하기 위해 쓴 기묘한 책, 즉 책 너머의 책 같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나의 독해는 항상 미완이나 실패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종교만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종교로 인해 그만큼 나도 세상도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를 먹고 산다. 더 이상 미래가 맛있는 시간의 먹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 속에서 발걸음은 더뎌지고 자꾸 과거로 헛걸음질 칠 때가 많아진다. 이렇게 자꾸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만들어 낸 시간의 책이 나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문한다. 내 인생은 얼마나 두꺼운 책이 되었느냐고,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책을 이제 어떻게 이어갈 것이냐고.

나는 가끔 종교가 과거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지금 우리의 종교들은 그저 이미 완성된 종교를 기념하거나 추억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과거의 종교가 현실 종교의 아바타로 기능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현재의 종교들이 과거라는 자기만의 가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일전에 나는 현대 종교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해석의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한편에서 현재의  종교는 영성화를 지향하는 탈물질적인 경향을 보인다. 치유나 명상을 강조하는 경향이 그러하다. 다른 한편에서 종교는 물질화의 충동에 시달리면서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 현실 안에 자리 잡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거대한 종교 박물관과 기념관을 짓고 전국 도처에 종교의 성지를 조성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처음에는 영성화와 물질화라는 이 정반대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전국에 수많은 영성센터, 치유센터, 명상센터가 건립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영성과 물질의 공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치유, 명상, 영성에 도움이 될 때만 종교의 물질화는 국가나 지자체의 거침없는 지원을 받거나, 일반 대중의 무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용적인 종교이자 미려한 종교가 된 것이다.

나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교분리는 종교의 생존을 아무도 걱정하지 않을 만큼 종교의 힘이 강할 때 생긴 이념이다. 종교의 자유도 지나치게 강한 종교의 힘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생긴 이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낡은 이념으로는 이제 종교의 생존과 관련한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미 정교분리나 종교의 자유는 허울뿐인 적당한 구실이나 변명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종교도 사회 안의 구성원이고 보편 복지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정치적 지원을 무조건 비난해서도 안 된다. 

사람처럼 나이가 든 종교도 과거를 먹고 살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리는 기념비 건축에만 몰두할  때 종교는 황혼의 우상이 되어 서서히 균열을 내며 쓰러지고 말 것이다. 또한 종교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의 자리에 만족할 때, 종교는 아무도 읽지 않는 두꺼운 책에서 세상의 모든 해답을 발견하는 점술의 자리에 머물 것이다.

나는 가끔 세상도 이제 엷은 종교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어 버린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엷고 묽고 말간 사람만 살아남을 것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종교마저 각자도생 한다면 우리에게 종교는 왜 필요할 것인가? 종교가 자기의 과거만을 삼키고 타인의 미래는 뱉어낸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changyick@gmail.com

[1664호 / 2023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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