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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건국절’은 필요 없다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3.08.21 11:08
  • 수정 2023.08.24 15:43
  • 호수 1693
  • 댓글 0

미국‧프랑스 등 유구한 역사‧문화 
기록해 온 나라에 ‘건국절’ 없어
‘광복의 감동’ 느끼기 어려워도
오늘을 사는 국민은 ‘기억’해야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8‧15 광복절 축사에서 ‘독립운동’을 ‘건국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한 이종찬 광복회장은 윤 대통령 면전에서 “흥망은 있어도 민족의 역사는 끊기지 않았다. 정부는 일시적으로 없어도 나라는 있었다”고 일갈했다. 광복절이 건국절이 될 수 없음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결코 건국으로 둔갑될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 모두 한 번쯤은 ‘건국’을 거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8월15일을 ‘건국 50년’으로 규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3년 8‧15 경축사에서 “지금 우리는 해방과 건국의 역사 위에서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며 건국의 의미를 전했다.

‘건국’이 사회적 논란으로 급부상한 건 이명박 정부 때다. 2008년 8‧15 경축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은 성공의 역사였다”며 ‘건국 60주년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다. 당시 역사학계와 시민단체들이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바꾸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건국절 제정을 주장해 왔던 뉴라이트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뉴라이트는 이명박 정권을 창출한 핵심 세력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건 ‘시간문제’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뉴라이트는 끝내 대안 국사교과서를 출판하며 자신들이 내세운 식민지 근대화론을 담았다. ‘건국 68주년’을 언급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물론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 무산됐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건국절 지정에 무게를 둔 세력이 윤석열 정권 창출에 큰 힘을 보탰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8.15 경축사에서 건국을 언급한 게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윤 대통령이 건국절을 거론한 적은 없다. 그러나 남은 임기가 많은 만큼 일부 세력의 종용에 오판을 내리면 언제든 건국절 지정을 주장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이전에 ‘건국’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2006년 8월 뉴라이트 계열의 이영훈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게 발단이었다. 칼럼의 내용 일부를 짚어보자. 

‘대한민국은 모든 나라에 있는 건국절이 없는 나라이다.’ 틀렸다. 시쳇말로 ‘좀 잘 산다’는 나라, 장구한 역사‧문화를 기록‧축적해 온 나라 대부분은 건국절이 없다. 근대국가의 출현을 건국으로 정하면 그 이전의 역사를 단절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미국 보스턴의 하버드대에 들른 그날은 우연히도 미국의 건국기념일이었다.’ 아니다. 미국도 건국절은 없다. 이 교수가 우연히 본 축제의 그 날은 ‘독립기념일’이었을 것이다. 프랑스도 ‘혁명기념일’은 있어도 건국절은 없다. 

‘1945년 8월의 광복에 나는 그리 흥분하지 않는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후대에 태어난 사람의 입장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다.’ 흥분과 감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동하는 사람이 점차 적어지는 ‘경향’과 ‘사실’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꿀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광복의 그날을 기억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천득 선생의 글 ‘1945년 8월15일’을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음미하는 건 기억하기 위함이다.

“그때 그 얼굴들, 그 얼굴들은 기쁨이요 흥분이었다. … 누구의 손이나 잡고 싶었다. 얼었던 심장이 녹고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았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두 다 ‘나’가 아니고 ‘우리’였다.” 

역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고한 바 있다. “건국의 강조가 대한민국의 뿌리를 잘라내는 방향으로 가면 위험하다. 임정을 잘라내면 친일파가 살아난다.”

[1693호 / 2023년 8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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