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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이 남긴 작은 불씨 살려, 세상도 따뜻이 데우겠습니다”

  • 무진등
  • 입력 2023.12.17 14:00
  • 수정 2023.12.21 17:02
  • 호수 1709
  • 댓글 3

장세철 ㈜고려건설 회장
(제9교구본사 동화사 신도회장)

화성 용주사 자승 스님 다비식서
인도 순례 전법 외친 순간 떠올라
어린 시절 놀이터 삼던 동화사서
신도회장 맡으며 신심 원력 다져
평상심 유지 위해 아침에 늘 기도
사무실 한 켠에 관세음보살 모셔
“제 여건에서 최선 다하는 게 전법
보시행으로 회향하는 삶 살겠다”

“스님 불 들어가요. 어서 나오세요.” 

유독 추운 날이었다. 12월3일 경기도 화성 용주사에서 엄수된 자승 스님의 다비식. “거화(炬火)!”라는 선창이 들리자 지푸라기 뭉치를 든 스님들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가사·장삼으로 둘러싸인 장작더미가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장을 찾은 장세철 ㈜고려건설 회장(제9교구본사 동화사 신도회장·62)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그 순간 작은 불씨 하나가 그의 겉옷에 달라 붙었다. 불씨가 점점 커지자 옆사람이 깜짝 놀랐다. “저기요! 불, 불!”하고 소리를 지르며 장갑 낀 손으로 그의 팔을 툭툭 쳤다.

불이 꺼지자 장 회장의 까만 겉옷에 불씨 자국이 선명히 드러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하얗게 드러난 솜뭉치를 무심히 바라봤다. 한줌 재로 돌아간 법구가 불길 속에서 전하는 ‘무언의 법문’ 같았다. 대구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생각했다. 우연이 아닐 수 있었다. 왜 이런 불씨를 남겼을까.

자승 스님과 오랜 인연이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제13·14대 종정 진제 스님, 동화사 방장 의현 스님을 모시면서 자승 스님을 만났고, 그때마다 짧은 인사를 나눴다. 의현 스님을 모시고 동화사 사부대중 300명과 올해 3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떠났을 때도 스님의 법문은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장 회장은 작은 불씨 자국을 보며 그날이 떠올랐다고 했다.

“룸비니와 한국사찰 대성석가사에서 법회가 열렸습니다. 전법을 외치던 그 순간이 떠오르더군요. ‘한 사람에게라도 부처님 법 전하겠다는 굳은 신심으로 나아가라. 이게 우리가 부처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는 이유다.’”

장 회장은 2018년 3월12일 조계종 제9교구본사 동화사 신도회장에 취임했다. 부모님이 독실한 불자였다. 고모는 비구니 스님이었다. 고향은 청도였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대구 동화사와 갓바위(선본사)를 다녔다. 대웅전 앞마당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기 바빴다. 그 무구한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돼 동화사 사부대중의 화합과 결속을 돕는 신도회장이 됐다.

"지금이야 백안삼거리를 지나면 금세 동화사가 나오죠. 하지만 어릴 때만 하더라도 달구지를 타고 내려서 한참 걸어야 했어요. 그래도 절에 가는 게 얼마나 좋던지, 앞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었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절에 다녀오는 길에 어묵을 사주셨거든요. 하하."

친근한 사투리, 싱긋한 미소로 자신을 '소박하게' 소개했지만 사실 그는 고려건설 ‘풀비체’를 대구 최고 시세 아파트 브랜드로 성장시킨 뛰어난 기업가다. 2017년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상 건설부문에서 대상을 받았고, 서울대 국제대학원 글로벌최고경영자(GLP) 선정 한국경영대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사회 흐름을 꿰뚫고 빠르게 돌파구를 찾는 전략가의 면모로, 지난해 4월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도 맡았다.

한땐 정계에도 입문했다. 1990년대 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운명처럼 만났다. 17년 간 정계에 있으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은 이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기는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함께 찾아왔다. 제17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됐던 이 전 총리가 다른 후보지지 의사를 밝히며 중도사퇴한 것. 이 무렵 이 전 총리와 함께 일하던 이들은 새 정치인을 찾아 터전을 옮겼다. 하지만 장 회장은 그럴 수 없었다. 다만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무렵 고향 청도와 가까웠던 영천 청하사와 인연이 닿았다. 법심 스님과 찻잔을 사이에 두고 종일 얘길 나눴다. 마지막 찻잔이 채워질 쯤이면 엉켜버린 마음 속 실타래도 ‘스르륵’ 풀리는 듯 했다. 정치만이 유일한 세상이었던 그에게 스님은 제행무상의 진리를 일러줬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와도 마주할 수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생각은 실체가 없었다. 갇혀 있던 세상에서 빠져나오니 나아갈 길도 선명해졌다.

“청하사를 매일 가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머릿 속이 아주 복잡했거든요. 그런데 스님이 주신 따스한 차 한 잔 마시다 보면 머리 끝까지 차오르던 감정이 차근이 정리됐어요. 세속을 초탈한 듯한 스님의 웃음에 무거운 마음도 내려놓게 됐죠.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시점이고, 부처님 가르침이 일상 속에 파고든 시기였습니다.”

주택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2003년이다. 고려주택 권상진 회장은 그의 전략가적 면모와 강한 추진력을 눈여겨 봤고 사업 승계를 결정했다. 권 회장의 안목은 옳았다. 고려건설은 치열한 경쟁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빠르게 성장했다. 장 회장은 2006년 ‘배움, 도전 그리고 나눔’이란 캐치프레이즈를 새롭게 내걸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관점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갔다.

복을 쓴 만큼 사회에 회향해, 다시 복을 쌓아야 한다는 게 그가 가진 경영 철학. 이런 낮고 겸손한 자세는 고려건설이 ‘선행에 앞장서는 기업’라는 강한 인상을 남기게 했다. 장 회장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적인 사례가 100% 무료로 운영되고 있는 ‘풀비체 문화대학’이다. 50대 후반부터 70대까지 300명이 모인 인문학 배움터다. 배움으로 얻은 가치는 고스란히 봉사로 이어지고 있다. 

“풀비체 문화대학은 ‘나를 찾는다’를 슬로건으로 운영됩니다. 누구나 불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목적이에요. 전반기 16주, 후반기 16주 매주 월요일 2시간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고요. 인문학 강의로 배운 가르침이 봉사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을 넘어 보살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일을 하다 마음이 움츠러 들면 사찰을 찾았다. 법당에 앉아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스님들은 이때마다 그에게 법명으로 시의적절한 가르침을 줬다. 차를 나누던 청하사 법심 스님에게 받은 법명은 ‘무상(無常)’이었다. 항상한 것은 없다는 일성이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봉암사 서암 스님에겐 ‘청록(靑鹿)’이란 화두를 얻었고, 종정을 지낸 진제 스님에겐 ‘고경무진(古鏡無塵)’의 ‘고경’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오랜 거울에 티끌이 없다는 뜻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사물이 가볍다고 해서 거울이 가벼운 것이 아니고, 비친 사물이 무겁다고 해 거울이 무겁지 않듯이요. 있는 그대로 봐야한다는 가르침 같아요. 법명을 화두 삼아 정진하고 있습니다.”

장 회장은 부처님 가르침이 감정을 잘 다스리도록 돕는 지혜 같다고 전했다. 감정에 지배 당하지 않아야 삶도 윤택해진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는 '평상심'을 유지하고자 아침엔 기도, 저녁엔 포행을 놓치지 않는다. 기도를 위해 집무실 한 켠엔 자그마한 불단도 마련해 뒀다. 방장 의현 스님이 창건한 성불사 요사채에서 모셔온 관세음보살님이다. 의현 스님의 집전과 여러 스님의 도움으로 점안식도 여법하게 진행했다. 그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 차를 내려 불단에 올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오늘도 너른 안목과 지혜를 주세요. 관세음보살님.'

"건설업이다 보니 순간적인 판단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거든요. 직원들의 생계가 달린 일이기도 하고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게,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기도하는 거죠. 인간은 감정 덩어리입니다. 어쩔 땐 순한 양 이상의 순수함을 갖고 있다가도, 한 순간에 누군가를 해할 만큼의 악한 감정을 품기도 합니다.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해요. 아침엔 기도로 감정을 다스리고, 저녁엔 포행을 하며 하루를 성찰합니다.”

동화사 신도회장으로서 주력하고 싶은 것은 ‘사명대사 박물관 및 교육관 건립’이다. 이는 방장 의현 스님의 원력 사업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 대신은 당쟁에 헤맸다. 군관은 전선에서 도주하기 바빴다. 하지만 스님들은 달랐다. 끝까지 나라를 지켰다. 철저히 피지배 계층이었고 나라를 지킬 의무도 없었다. 오직 백성만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규합해 전장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스님들 활약상은 누락됐다. 공적은 유생과 관료 중심으로 왜곡됐다. 장 회장은 의현 스님을 도와 사명대사 기념사업을 마무리 짓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특히 사명대사는 장군이자 협상가이며 영웅이었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시킨 것도 사명대사였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중요하지만 사명대사의 공도 그에 못지 않죠. 나라와 국민을 위한 헌신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의현 큰스님은 연세가 90이 넘으셨어요. 몸이 편치 않으신 데 오직 법력으로 ‘호국·호법 정신’을 되살리기에 앞장 서고 계시죠. 저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스님을 도와 의승 정신을 전 세계에 알릴 기반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장 회장은 다비식에서 입었던 겉옷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스쳐지나갈 만한 순간도 귀하게 여기고 쌓아나가는 그에게 '옮겨 붙은 불씨가 어떤 의미 같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 여건에서 나름대로 법을 전하라는 가르침 같다"며 "동화사 신도회장으로 제9교구 본말사 사부대중의 결집과 화합을 돕고, 한 기업의 수장으로서 사회를 나아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불씨가 제게 남긴 전법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고 볼웃음을 지었다.

형형한 눈빛과 무구한 미소로 "선지식이 제게 남긴 작은 불씨를 키워 세상을 따뜻하게 데워 나가는 데 쓰겠다"는 장 회장.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한 그 만의 여정은 오늘도 뜨겁게 진행중이다.

대구=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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