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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톺아보기] 3. 챗GPT 선정 ‘결정적 행보 TOP5’

  • 새해특집
  • 입력 2024.01.02 15:39
  • 수정 2024.01.02 15:43
  • 호수 1710
  • 댓글 0

세계평화·종교 간 소통 노력에 세계인들 깊은 관심 집중

1959~2020년 총 449회 해외순방으로 글로벌 사회 이목 집중
챗GPT 선정 장소들, 달라이라마 향한 대중 관심 향방 보여줘

 

첫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가 로마 교황청 주최로 1986년 10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열렸다. 각 종교의 지도자가 최초로 한 자리에 모인 이 대회에서 달라이라마(맨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도 참석했다. 달라이라마 오른쪽 두 번째 스님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다. 
첫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가 로마 교황청 주최로 1986년 10월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열렸다. 각 종교의 지도자가 최초로 한 자리에 모인 이 대회에서 달라이라마(맨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도 참석했다. 달라이라마 오른쪽 두 번째 스님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다. 

“달라이라마는 지구 각지에서 티베트 문제, 평화, 비폭력, 인간성을 강조했으며, 인류 공존과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지속적인 영감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달라이라마가 세계 각국에서 보여준 활동과 메시지를 한 줄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생성형AI 챗GPT(chatGPT)는 달라이라마의 해외 활동에 대해 위와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정확히 2초 남짓한 시간이었다.

조금 더 무게감 있는 질문을 넣어보기로 했다. 1959년 인도 망명 이후부터 지금까지, 달라이라마가 수도 없이 행했던 해외 활동 중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판단할 만한 순간을 뽑아달라고 질의를 넣었다. 여기에는 정확한 요구 수행을 위한 다양한 조건이 필요했다. 세계 각 지역에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나온 관련 보도와 달라이라마 공식 오피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할 것, 보도 횟수와 각 행사에 따른 후속 보도 등을 바탕으로 중요도를 판단할 것 등이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조건을 추가하면서 선정 과정을 다듬어갔다. 그렇게 챗GPT는 5가지 장면을 선정했다. 

이번 결과는 달라이라마가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모였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식 오피스의 기록에 따르면 달라이라마는 1959년부터 2020년까지 총 449회의 해외 순방을 다녔다. 그 사이에 남은 행적 중에는 글로벌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순간이 숱하게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챗GPT가 가능한 범주에서 객관적으로 대중의 관심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식에 따라 선정한 리스트이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충분하다. 다만 진행 과정에서 생성형AI가 가진 단점도 여럿 노출됐다. 학습을 진행한 방대한 자료 안에는 허구의 사실과 검증되지 않은 오류가 많았고, 이를 받아들인 결과물이 크게 영향을 받는 문제가 여럿 발견됐다. 챗GPT와 협업은 빠르고 간편했지만 오랜 시간 이런 문제를 찾아 검토하고 보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1959년 인도:망명
달라이라마의 첫 번째 해외 활동은 1954년으로 봐야할 것 같다. 당시 달라이라마는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났다. 1950년 여름 중국군이 무력으로 창두(昌都)를 점령하자 티베트를 지키기 위해 중국 측의 ‘화평해방’ 17개 조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1959년 티베트인들의 무력봉기에 이은 중국군의 대학살이 일어나자 인도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한다. 죽음을 불사한 탈출을 감행해 혹한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은 티베트인들은 인도에 도착했다. 2600km를 걸어 인도에 안착한 뒤, 1959년 4월 18일 국제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달라이라마는 중국 측이 무력을 동반해 들이밀었던 ‘화평해방’ 17개 조항과 마오쩌둥 간에 맺었던 회담 결과를 공식 거부한다. 죽음을 넘어 티베트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중국 정부 측은 지금도 1954년 베이징 방문 당시 마오쩌둥과의 회담 이후 달라이라마가 공식적으로 중국의 국무위원이었음을 강조한다.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인물임에도 정치적인 선동을 이어오고 있다는 의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일었던 ‘프리 티베트’ 시위 당시에도 재한 티베트인들의 활동은 잘못됐다는 걸 말하기 위해 중국 측은 그 사건을 일례로 들었다. 티베트 망명정부 측이 중국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록이 당시의 국제기자회견이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유럽:국제사회에 첫 등장
챗GPT는 달라이라마의 첫 해외 등장을 1973년이라며 여러 순간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는 첫 해외 일정은 아니었다. 이에 앞선 1967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달라이라마는 연설문을 발표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쉽게도 당시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티베트의 현실을 전하는 입장이 담기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아마도 챗GPT의 답변은 1973년이 달라이라마가 국제사회에 처음 등장한 해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서방의 기준에서 달라이라마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 해 9월 28일부터 장장 75일에 거쳐 달라이라마는 유럽의 각 국을 순회한다. 처음 이탈리아로 입국한 그는 9월 30일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만났다. 돌이켜 보면 최고의 두 종교 지도자가 처음 마주한 센세이션한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달라이라마는 지금과 같은 인지도를 가지지 못했다. 그 뒤로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서독, 오스트리아 등지를 돌며 주요 정치인이나 왕가를 만나고 돌아왔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당시의 기록이 많지는 않다. 확실한 것은 달라이라마가 서방세계에 ‘티베트’라는 국가를 인지하도록 했고, 달라이라마의 활동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불씨를 지폈다는 사실이다. 

◆1986년 이탈리아 아시시:첫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 참가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아시시(Assisi)는 세계 종교 역사에 있어 아주 특별한 곳이다. 1986년 역사상 처음으로 티베트, 한국, 일본 등지의 불교, 개신교 32개 종파,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등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종교 지도자 40명이 한 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세계 종교인 평화기도회’라고 부르는 이 행사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각양각색의 종교 의복을 입은 종교별 최고 지도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자리에 서 있는, 그때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 대표자는 달라이라마였다. 물론 한국, 일본, 태국의 불교계 대표자 역시 그 곁에 함께했다. 당시 기록으로 남긴 사진에는 모든 지도자가 입을 모아 기도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모습은 세계 모든 인류에게 생소하고도 짜릿한 전율을 안겼다.
이 자리를 만든 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염원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종교로부터 온 우리가 오늘 역사상 처음으로, 각자의 신앙 전통에 따라 평화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세상 앞에 증언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 종교인 사이의 반목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실제로 이 행사 직후 일부 지역에서는 전쟁이 멈추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보인다. 세계평화와 종교화합을 강조하며 늘 실천에 옮겨왔던 달라이라마에게도 이 기도회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순간으로 남았다. 이후로도 달라이라마는 수시로 종교간 대화를 실천에 옮기면서 평화로운 공존을 만들어가려 애쓰고 있다. 

◆1989년 노르웨이 오슬로:노벨평화상 수상
달라이라마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이다. 25개 단체, 76명의 개인 등 101명의 후보 중에서 선정한 결과였다. 노벨상위원회는 “수십 년 간 티베트 독립을 위한 평화적 투쟁을 이어왔고, 우주와 모든 인류, 생물에 대한 존엄성을 주창해 온 것이 선정 사유”라고 밝혔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건 그가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티베트의 현실을 전하려 했던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는 첫 유럽 순방 이후 1979년 미국을 처음 방문했고, 그 뒤로부터 ‘폭발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국제 활동의 비중을 높였다. 각국의 정재계에서도 그의 발걸음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만큼 티베트인이 처한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전할 기회가 많아졌다. 더불어 달라이라마가 주목을 받았던 건 중국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그는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분노와 적개심은 버려야 할 것으로, 평정심과 자비는 늘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입장은 노벨평화상 수상 수락 연설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지난 40년간의 점령 기간 동안 우리 국민들이 겪은 고통은 잘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투쟁해 왔습니다. 폭력은 더 많은 폭력과 고통을 낳을 뿐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투쟁이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증오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의 친구는 물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고통과 아픔을 줄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2년 영국 런던 세인트폴 성당: 템플턴상 수상
템플턴상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이 상은 과학과 종교 간의 이해를 넓혀가자는 의미에서 1972년 미국 태생의 영국 금융인 존 마크 템플턴이 만들었다. 존 템플턴 재단은 2012년 수상자로 달라이라마를 선정했다. ‘망명 이후 보편적 윤리와 비폭력, 세계 종교 간 화합을 위해 지속적으로 커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달라이라마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상을 받았지만, 노벨상에 이어 템플턴상을 수상함으로서 티베트와 인류를 향한 그의 노력이 다시 한 번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됐다.

달라이라마는 수락 연설에서 “서로 다른 종교 간의 이해를 실천하기 위해 헌신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자초한 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오직 비폭력과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며 “과학과 영성, 특히 신경과학과 불교과학 사이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함께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지난 30년 간 여러 분야의 과학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현실이 무엇이고, 그것이 윤리와 인간의 가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고민하고 논의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상금으로 주어진 상금 중 150만 달러를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인도 어린이를 위해 세이브더칠드런 기금에 기부했다. 나머지 20만 달러는 30년 동안 과학과 영성 사이의 중요한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 마인드앤라이프 연구소에 전달했다. 

정태겸 여행작가 

[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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