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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톺아보기] 1. 텐진 갸초, 그는 누구인가

  • 새해특집
  • 입력 2024.01.02 15:24
  • 수정 2024.01.02 16:27
  • 호수 1710
  • 댓글 0

자비와 유머로 중생 아픔 어루만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

티베트 작은 마을서 태어나
달라이라마 환생자로 인정

1959년 중국 인민군 침공에
인도 다람살라 망명정부 수립

비폭력·평화주의로 독립 운동
티베트 문화 정체성 위해 노력

2011년 총리에 권력 이양 후
종교 지도자로서 삶 살아가

달라이라마의 한국 방문이 ‘다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33·34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자승 스님(1954~2023)이 입적하기 한 달 전 중앙종회 종책모임 ‘불교광장’에서 달라이라마 방한 법회를 제안하면서부터다. 자승 스님은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을 계기로 불교계 종단이 화합하고 청년불교가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2027년 8월 서울에서 열릴 세계 가톨릭 청년대회에 교황 참석이 확실시되는 점, 달라이라마 세수가 여든아홉인 점도 방한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로 꼽혔다. 법보신문은 ‘달라이라마 톺아보기’를 주제로 새해 특집을 마련했다. 달라이라마의 일생, 세상에 전한 메시지, 달라이라마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전하는 일화를 함께 살펴본다. 편집자
 

“당신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하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수행자일 뿐입니다. 제가 신이라면 목이 마르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곤 한다. 한 책에 묘사된 이 수행자는 바로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89)다.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그의 하심(下心)과 유머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노벨평화상’을 포함해 수많은 인권상 수상자이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유명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한 독일 잡지는 현존 인물 중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고르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33%가 달라이라마를, 그 다음으로 많은 14%가 교황을 선택했다. 2010년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구 6개국에서 이뤄진 설문에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로 달라이라마를 선정했다. 정치·민족·종교의 한계를 벗어난 전 세계인으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임이 드러난 결과다. 미국 갤럽이 매년 조사하는 ‘존경하는 남성’에도 상위 10위에 이름을 올린다. 62개국 이상의 나라를 방문하며 비폭력,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달라이라마, 그는 누구일까. 

◆유년 시절과 교육과정
달라이라마는 1935년 7월 6일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티베트 동북부 암도 지방의 탁체르(Taktser)라는 곳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라모 톤툽(Lhamo Thondup). 아이가 두살되던 해 섭정 중이던 레팅 린포체(Reting Rinpoche)는 어느 날 환영을 보고 1933년 서거한 달라이라마 환생을 찾기 위해 국경지대로 사절단을 보낸다. 사절단 일행은 섭정이 꾼 꿈인 “라모 라초(Lhamo Latso) 호수에 반짝이는 Ah(아), Ka(까), Ma(마)”를 토대로 아이의 집을 찾았다. 

1937년 티베트의 섭정은 여러 차례의 시험 과정을 거쳐 어린 소년 라모가 13대 달라이라마의 화신임을 인정했다. 라모는 항상 달라이라마가 살았던 티베트의 수도 ‘라사'로 가겠다고 했고, 라마의 화신을 찾기 위해 하인으로 변장하고 왔던 고승들이 ‘라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아이는 케상 린포체 무릎에 앉아 목에 걸고 있는 염주가 자기 것이라며 달라고 졸라댔다. 그 염주는 4년전 세상을 떠난 13대 달라이라마 툽텐 갸초(Thubten Gyatso)의 것이었다. 이외에도 북, 지팡이로 시험했다. 아이는 그때마다 정확히 13대 달라이라마가 쓰던 것을 가려냈다.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고 2년 후 텐진 갸쵸는 집을 떠나 가족들과 함께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 궁에 들어갔다. 6세부터 링 린포체로부터 불교 철학을 교육받았다. 25세가 되던 1959년 불교 철학박사 학위에 해당되는 게쉬를 마쳤다. 게쉬는 논리학, 중관철학, 인식론 불교교학, 계율론 등을 수업하고 고승들과의 논쟁을 통과해야 마칠 수 있다. ‘겨울궁전’ 포탈라 궁과 ‘여름궁전’ 노블링카 궁을 오가며 티베트 최고의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중국 침공과 망명정부 수립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텐진 갸초는 16세의 나이로 14대 달라이라마에 즉위하고 UN에 티베트 문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티베트 문제는 UN 총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이에 달라이라마는 베이징에 대표단을 파견해 협상했지만 중국의 강압에 의해 오히려 라사에 중국군 진주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17개 조항의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1954년 텐진 갸초는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의 지도자들과 티베트 문제를 협상했지만, “티베트는 불교라는 독약에 물들어 있고 중국은 티베트를 해방하기 위한 어머니 나라”라는 중국의 입장을 돌려놓지 못했다.

1950년 이후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봉기는 1959년에 절정을 맞았다. 3월  10일, 경극에 초대된 달라이라마가 중국에 의해 납치될 것이라고 생각한 라사 시민들이 노블링카 궁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 집회 후 며칠 동안 티베트 독립을 위한 시위가 계속됐다. 중국군과의 충돌 과정에서 12만 명의 티베트인이 학살됐고, 6000여 개의 사원이 파괴됐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떠나야 학살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3월 17일 달라이라마는 평범한 군인으로 변장하고 여름궁전 노블링카를 빠져나왔다. 달라의라마는 국제 사회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망명했다. 

◆민주적 망명정부 조직,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 후 네루 수상의 도움을 얻어 인도 동북부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40년 동안 달라이라마는 학교, 수공예 공장, 예술학교까지 설립하며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1963년 티베트 헌법의 초안이 마련됐다. 달라이라마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망명정부를 재조직했고 사원제도를 개혁했다. 이런 노력으로 티베트 망명정부 의회의 의원은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내각은 이 의회 의원들에 의해 선출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티베트가 독립을 쟁취하면 정치적 권한을 가지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고, 의회 의원의 2/3가 대법원과 협의하여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때는 실권을 평의회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도 만들었다. 그는 2001년 다람살라에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데 이어, 2011년 티베트 난민들의 직접선거로 뽑힌 롭 상 상게 총리에게 정치권력을 모두 이양했다. “400년간 이어져 오던 법왕 체제를 내 손으로 끝냈다”면서 “나로서는 완전히 다 내놓은 것”이라며 자신의 역할을 종교 지도자에 한정했다.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달라이라마의 노력으로 망명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9년, 1961년, 1965년에 걸쳐 UN은 중국정부가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존중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시종일관 비폭력 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무장 게릴라 캄바의 대 중국 투쟁 노선에 반대했고, 결국 캄바는 그의 명령에 의해 해산됐다.

1987년 달라이라마는 세계인권회의에서 티베트의 미래와 관련해 ‘5개의 평화안'을 중국에 제안했다. 그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티베트의 독립이 아니라 완전한 자치지역으로서 티베트를 보장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중국을 가리켜 “우리에게 인내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가장 큰 스승”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에 헌신한 점이 인정받아 달라이라마는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는 “티베트 독립운동에 있어 끝까지 폭력 사용을 반대한 달라이라마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는 티베트 국민들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관용과 상호존중에 기초한 평화적 해결안을 제시했다”고 언급했다. 달라이라마는 막사이사이상과 스웨덴 일렌베르히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평범한 스님로서의 삶
달라이라마는 다람살라에 있는 작은 집에 살면서 새벽 4시면 일어나 명상을 시작하고 아침 식사 후 9시까지 다시 명상, 그후 점심 때까지는 경전을 읽고 공부한다. 오후에는 주어진 회의와 설법과 의식을 수행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기도시간을 갖는다. 

그는 스스로를 “단순한 승려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소개한다.  누구를 만나든 스스로를 낮추고 인자한 얼굴로 맞는 그의 모습에서 ‘겔룩파 수장’ ‘티베트불교 서열 1위’의 권위는 찾기 힘들다. 대신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각인될 뿐이다. 스스로를 ‘웃음전문가’라 부르는 달라이라마는 아흔을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법회와 강연, 순방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그런 달라이라마 방한 문제는 이제 한국 불교계가 ‘이룩해야 할 불사’가 됐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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