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⑮ 불교계의 3·1운동(2) - 해인사

기자명 법보신문

스님-청년학생 만세운동 주도적 참여

사찰서 독립선언서 3000여장 등사… 경남 곳곳서 배포
만세운동 후 만주로 흩어져 독립운동… 많은 희생 치뤄

<사진설명>1915년 무렵의 해인서 전경.

불교계의 3·1운동은 전국에 걸쳐 큰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 기간은 대략 3월 초순부터 4월 하순까지였고, 장소는 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 장날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불교계의 3·1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가 많지 않아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서술할 만한 자료가 남아있는 해인사·범어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하고 여타 사찰의 만세 시위는 묶어서 그 대략을 서술하기로 한다. 일제시대에도 해인사는 법보사찰로서 30본사 가운데서도 재적 승려 수와 재정적인 면에서도 비교적 형편이 나은 거찰이었다. 1906년부터 명립학교를 설립·운영하였는데 1908년 해명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나라가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6년에 작성된 전국 본사에 소속된 말사와 승니의 숫자 및 신도수를 보자면 말사가 80개 소속 승려 619명, 신도수 22,664명으로 30본사 가운데 손꼽히는 사찰이었다. 1924년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었을 때 재단적립금 60만원 가운데 해인사가 94,800원이라는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납부한 것으로 보더라도 규모와 재정적인 면에서 본사 가운데서도 여유가 있는 사찰이었다. 일제는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장경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경내에 주재소와 경비전화를 설치하고, 일본인 순사 부장 1명과 한국인 순사 2명을 배치하였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해인사의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빌려 승려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해인사 본사에는 승려 350여명과 지방학림 학생 약 90여명과 해인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지방학림과 보통학교의 교사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백초월과 김포광·백월우·백월주 등이었으며 일본인 교사도 두 명 있었다고 한다. 주지 이회광은 친일 행각으로 말미암아 일반 승려들과 해인사 지방학림 및 해인보통학교 생도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해인사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수 배경으로는 지방학림과 보통학교 생도 300여명이 매주 토요일에 한 번은 토론회 한 번은 강연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의식 수준을 향상시키는 정기 집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토론회와 강연회의 개최는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양에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해인사 3·1운동 발발 단서를 제공한 독립선언서는 경성 중앙학림 김봉신으로부터 김봉율에게 전달된 것과 역시 중앙학림 학생이었던 도진호로부터 송복만에게 전달된 것 그리고 최범술의 조카 최원형으로부터 최범술에게 전달된 것 등이 있었다. 이들은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당도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해인사의 3·1운동 전개에 큰 역할을 하였던 최범술을 대구로 보내어 미농지 1만 5천여 매를 구입해 오도록 하였다. 종이가 구해지자 이들은 해인사 사무실과 지방학림 및 보통학교에서 사용하던 등사판 3개를 훔쳐내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교실로 쓰던 해인사 극락전에서 등사를 하고 관음전 큰 방의 빈 다락에서 촛불을 밝히고 손으로 독립선언서를 썼다고 한다. 선언서 한 장을 등사하는데 미농지 석 장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최범술의 회고에 의하면 등사된 독립선언서는 3천 1백여 매라고 한다. 등사를 마친 청년 학생 대표들은 장경각 뒤 숲속에 모여 회합을 가지고 향후의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회합에서 결정된 것은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만약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더라도 거사 계획의 전모와 동지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을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이들은 사전에 일본 경찰의 심문을 받을 경우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고춧가루에 모래를 섞어 품에 간직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해인사 청년 승려와 학생들이 전개한 구체적인 활동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강재호·김봉률·기상섭 등이 한 조가 되어 경주, 양산 통도사, 범어사, 동래, 부산, 김해 방면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경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다행히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독립선언서 선포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다른 한 조는 송복만·손복용·최범술 등으로 이들은 합천, 삼가, 초계, 의령, 진주, 사천, 곤양, 하동 일대를 돌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합천읍에서 박운구·이석순·이정기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다시 삼가로 들어와 삼가 면사무소, 삼가 주재소 삼가 우편국 등을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거창에 있던 무장수비대 30명을 급파하여 시위 군중들에게 발포를 하여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최범술은 출가 사찰인 다솔사로 가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곤양 장날 만세 시위를 계획하던 중 사전에 일경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나이가 16세였지만 만으로 15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사 소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한 사실과 이후 만당 사건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1986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는 애족장으로 등급이 상향되었다. 또 다른 한 조는 박달준·박덕윤·손덕주·이덕진·김장윤 등으로 이들은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남원 등의 지방으로 갔다. 이들은 해인사에서 남쪽으로 삼십리 쯤 떨어진 가조 지방에서 일본 헌병 1인과 조선인 보조원을 만나 박덕윤과 손덕주가 체포되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목격한 이덕진은 품에 간직했던 고추 가루가 섞인 모래를 쥐고는 일본 헌병의 검문에 응하는 척하면서 고춧가루를 섞은 모래를 일본 헌병의 두 눈에 던졌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헌병은 무기를 이덕진에게 빼앗기고 그가 찼던 군도로 실컷 얻어 맞았다. 이덕진은 박덕윤과 손덕주를 구출하여 계획하였던 곳을 돌며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진설명>3·1운동 당시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이었던 김용곡이 불교도들에게 만세 시위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유한 경고문인 '경보법려'

그리고 일부는 해인사에 남아서 인근 부락민들과 승려들을 동원하여 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황해도 해주군 신광사 출신의 승려였던 홍태현은 백성원·김경환·김성구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31일 오전 11시에 해인사 홍하문 밖에서 지방학림 학생과 승려 등 200여 명이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오후 1시경에 해인사 경내에 있는 경찰 주재소로 몰려가서 시위를 전개하였지만 일본 경찰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그 날 밤 11시경 200여 명의 군중이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일본 경찰의 출동으로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태현은 일경에 체포되어 그 해 6월 11일 부산 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만세 시위는 4월 16일 야로 면민과 더불어 1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모자였던 박치수·기상섭·송봉우 등은 경내에 주둔하고 있던 주재소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당하였고, 박달준·김봉율·강재호 등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봉천성 유하현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김봉률·박덕윤·김장윤 등은 신흥무관학교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본국으로 잠입하여 유수한 사찰을 순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문경 김용사에 들렸을 때 김장윤이 경내에 숨어 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뒤따라 동정을 살피며 오고 있던 박덕윤·김봉률도 체포되어 2년 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김장윤은 체포되어 김용사로부터 문경읍으로 가던 도중 산기슭의 얼어붙은 험로에서 결박한 포승 끝을 잡고 앞서 가던 일본 순사를 뒤에서 쓰러뜨린 후에 산 위로 도망쳐서 탈출하였다.

해인사의 청년 학생들 가운데 애국심이 강하였던 학생들은 온 국민들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항거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3·1운동 이후 상해·만주 등으로 건너가서 임시정부를 돕는 활동을 하기도 하고 또 군자금 모집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한 사람도 있었다. 해인사의 청년 불교도들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불법에 의지하여 일제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3·1운동 당시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무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탄압한 까닭에 고귀한 생명을 희생한 사람도 있고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된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불법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