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씨
정지용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감고 한 밤 자고 나면
이슬이 내려와 같이 자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 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해바라기 씨를 심는 계절에 해바라기 씨를 시로 맛보는 일은 유쾌한 일이다. 지은이 정지용(鄭芝溶, 1902~ 1950)은 우리나라 시문학의 개척자로서 모더니즘 시와 서정시, 동시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동시는 1926년부터 방정환 주간의 ‘어린이’지 등에 발표해 왔는데, 1939년에 와서 ‘아이생활’지에 성공작 ‘해바라기 씨’를 발표하게 된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과정에
갓 시집온 새댁과 청개구리
어린이와 고양이 등장하는
동화 한편이 숨어 있는 시
해바라기 씨를 심은 이는 해바라기 씨를 심자, 하고 나선 어린이다. 나이가 들지 않은 꼬마인 것 같다. 시의 내용이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해바라기를 심은 곳은 꼬마들 숨바꼭질 터가 돼 주던 담 모퉁이다. 장소로 봐서 많은 씨를 심은 것 같지는 않다. 한 알 아니면 두 알이다.
그런데 심기 전에 마음을 써야할 일이 있다. 참새 눈을 숨겨야 한다. 참새 입에는 해바라기 씨가 과한 크기일지 모른다. 장닭이나 엄마 닭 눈은 정말로 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심은 해바라기 씨를 흙으로 덮고, 누나는 손으로 다진다. 바둑이는 앞발로 다진다. 고양이는 꼬리로 다진다. 여기서, 싹틔움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 밤이슬이다.
밤이슬은, 꼬마가 자는 밤 동안에 씨앗이 덮고 있는 흙 위에 놓여 같이 잠을 잔다. “싹틔움에는 내 힘이 있어야 해!” 하고 속삭였을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햇빛이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씨앗에 주는 입맞춤이다. 그것도 꼬마가 이웃에 간 사이에 살짝이 이뤄졌다 한다. 햇빛과의 입맞춤에서 “쪽!” 소리가 났을 거다.
해바라기 씨 심기는 생명사랑의 뜻을 지닌 꼬마와 누나의 손, 바둑이의 발, 고양이 꼬리, 밤이슬의 속삭임, 햇빛의 입맞춤이 어우러진 협동작업 이었다.
그런데 싹틈이란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날의 해바라기 씨를 족두리 쓰고 시집온 새색시에 견주었는데 썩 좋은 비유다. 사흘이 돼도 고개를 아니 든다고 했다. 수줍음 때문이었다.
청개구리 녀석은 성미가 별나게 급하다. 새색시 모습으로 고개를 내미는 해바라기 싹을 보려고 사철나무 잎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깩!” 소리를 치고 만다. “아이구 답답해!” 그 소리였을 게다.
그러나 해바라기 씨는, 마침내 싹틀 것이다. 키다리에다 환한 웃음으로 집을 지키며 꼬마들 여름 동무가 될 것이다.
정지용의 동시 ‘해바라기 씨’ 속에는 이처럼, 짤막한 동화(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래서 ‘동화와 동시는 하나의 뿌리’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한다.
한편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하는 시 ‘향수’로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은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줬던 193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가 중 한 명이었다.
신현득 아동문학가·시인 shinhd7028@hanmail.net
[1389호 / 2017년 4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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