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가 출간된 뒤로, ‘내포문화’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보원사 입구 바위에 새겨진 세 분 불보살님인 ‘서산마애삼존불’과 함께 보원사의 여러 성보 문화재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또한 많은 답사객이 찾아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십수년 전부터는 보원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 진행되면서 통일신라시대 이른바 ‘화엄십찰’ 중 한 곳이었으며 고려 초 왕실과 연계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웅장했던 이 절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우리 국민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곳이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는 전보다 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감탄사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비슷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불국사는 창건 이래 1000년 세월을 거치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데 일부 전문가를 빼고는 불국사의 현재 가람 배치와 전각‧불탑 등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김대성이 창건할 당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 불국사의 모습
고등학생 시절 3년 동안 역사와 철학을 가르쳐 주고, 졸업하고 10년이 훨씬 지난 뒤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집까지 오셔서 ‘사기’와 ‘논어’ 등 중국 고전 강독을 하며 한문의 문리를 틔워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고등학교 2~3학년이던 1972년과 1973년에 그 선생님이 “서울에 가서 좋은 강의를 듣고 왔다”는 말씀을 하시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불편한 몸으로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타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주에서 서울로 선생님을 유혹(?)했던 그 강의가 누가 하는 어떤 내용이었
‘10‧27법난’에 휩싸여 전국의 사찰이 몇 달 동안 강제적으로 침묵에 잠겼고, 스님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1981년 초, 대한불교조계종이 오랜만에 기지개를 펴고 불자들이 환하게 웃는 날이 왔다. 1970년대 내내 지속된 ‘종정과 총무원장의 갈등’ ‘종정과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싼 다툼’과 여러 승가세력들의 이합집산이 잠잠해지고, 새 종정과 총무원장을 선출하여 1981년 1월20일에 취임식을 갖게 된 것이다.이날 불교인뿐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눈이 조계사로 쏠렸다. 무엇보다도 ‘가야산의 호랑이’로 불리며 오랜 장좌불와와 동구
2003년 12월4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이 법랍 71세로 열반에 들었다. 월하 스님은 선사였지만, 한국불교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종단에 불어오는 바람, 때로는 태풍을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맞서 버텨낸 인물이었다. 월하 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월주 스님이 과연 조문을 갈까?” “조문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등등 월주 스님의 반응과 행보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소식을 듣자 곧바로 통도사로 달려가 월하 스님과의 인연을 말하며 고인에게 예를 다한 것으로 알려
“김영삼 대통령은 오늘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국방부 안에 있는 국군중앙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김대통령과 손여사는 1시간 동안 진행된 예배순서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봉독한 뒤 군인신도와 가족 300여명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김대통령은 이어 국군중앙교회 정재석 목사 등과 다과를 함께 한 자리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군장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인교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1996년 1월21일 저녁 9시 문화방송의 ‘뉴스데스크’에
“옛 절은 30여 칸에 지나지 않았는데,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중건하여 136칸이 되었다.” “총섭의 승영을 두었던 149칸의 사찰이었다.” ‘북한지’와 ‘동국여지비고’에 기록된 북한산성 내 중흥사에 관한 기록이다. 두 기록에 차이가 있지만, 당시 서울 근교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려 태조가 창건하고 고려 말 태고 보우 스님이 주지로 주석했다고 하지만, 중흥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어느 때인가에 세워져 조선 중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오다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은
지난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10‧27법난’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 “한국불교는 군부독재 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종교의 성역을 침탈당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38년 전 신군부가 전국의 사찰을 짓밟고 무고한 스님들을 연행했던 10.27법난이 그것이다. 불교계에 여전히 남아있는 깊은 상처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 불교계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어, 한국불교가 더욱 화합하고 융성하길 기원한다.”정부 차원으로는 1988년 12월30일 당시 국무총리(강영훈)가 “불교계 수사
6월7일 문화재청장 일행 10여명이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지를 찾아 원주시청 관계자와 ‘지광국사현묘탑(이하 ‘부도’) 이전 및 보존방안’ 등을 논의했고, 얼마 뒤 “지광국사탑을 원래 있던 법천사지로 이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부도는 조각이 뛰어나서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해서 20세기 초 이래로 숱한 고통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번 이전 결정 소식을 전하면서 ‘미인박명 지광국사탑의 파란만장한 파괴 유랑기’라고 한 일간지 기자의 한마디에 이 부도의 기구한 운명이 담겨있다.1911년 9월 일본인 모리라는 사람이 법천사 터
1994년 봄, 길고 긴 고통을 겪은 끝에 이른바 ‘조계종 개혁불사’가 이루어지고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신군부 세력의 압력을 받아 자리를 강제로 떠났던 월주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되고, 새로 들어선 총무원 집행부는 종단 역사에 볼 수 없었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승격하면서 행정 중심의 총무원이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업을 기획해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새 출발한 포교원은 이듬해인 1995년에 ‘한국불교 중흥 제1차 5개년 포교사업계획’을 수립하고 1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이승만 정권은 1951년부터 개신교와 가톨릭에게만 군종장교 제도를 허용하고 당시 최대 종교였던 불교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이 어려움이 풀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베트남 전쟁 참전에 따른 정부와 군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외부 요인 말고 불교계의 군종제도 진입과 군대 내 포교를 위해 애쓴 인사가 있었던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1967년 4월18일, 당시 국방부 인사국장 정승화 소장이 불교계의 군종 참여를 요구하던 대불련 대표들을 만나 ‘국방부의 군승제도 실시 원칙’을 확인하였다. 면담 자리에서 정승화
옛 스님들의 행적이 담긴 문서기록과 비문을 읽다보면 ‘사자사문(賜紫沙門)’이라는 표현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임금이) 자색 (법복)을 내려준 (명망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시대에는 출가수행자와 성직자도 왕에게 공식으로 인정받아야 자신이 속한 교단과 일반대중에게 그 위상을 드러낼 수 있었으므로, 이 ‘사자사문’이라는 표현만 갖고 “당시 불교가 너무 권력에 의존했다”고 비판할 것까지는 없다.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에, 그것도 다종교사회에 들어와서까지도 대통령을 전제왕조시절 임금과 같은 존재로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