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눈물 흘리게 말라’오현스님 일언 각인 실천 낙산사 복원불사 여념불구화재민 160가구 먼저 챙겨 ▲정념 스님은 ‘네 이웃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말라’는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의 일언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촛불 하나가 다른 촛불에게 불을 옮겨 준다고 그 불빛이 사그라지는 건 아니다./ 벌들이 꽃에 앉아 꿀을 따간다고 그 꽃이 시들어 가는 건 아니다.’ 흥천사를 오르는 길 내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아마도 그동안 흥천사가 가졌던 내력 때문일 것이다. 복마전(伏魔殿) 흥천사.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왕실 보호를 받았던 유서 깊은 산사 흥천사는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 이
대강백·선사 자신 없어 강원 졸업 후 하산 결심 이색풍경·미시세계 연카메라는 수행의 도반 ▲석공 스님은 자신만의 눈으로 만물을 담아내고 있다. 렌즈를 통해 얻은 혜안! 그건 연기였다. 자신만의 화폭에 담아 낸 건 다름 아닌 상생과 생명을 말한 ‘화엄’인 것이다. 석공 스님의 사진은 따뜻하다. 세상 그 모든 것들과 조우하면서 긴밀한 대화라도 나눈 듯, 그 어떤 소곤거림이 들려온다. 특별한 소재가 주는 낯설음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놓여있거나, 예로부터 있었던, 그 어느 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의 사물들이고 풍경이다. 하지만 석공 스님의 렌즈에 담긴 순간 피사체들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지
다른 이에 상처주면 줄수록정작 황폐해진 건 자기 자신 갈등은 분별·불만에서 시작치유 못하면 흉악범죄 늘어 ▲함주 스님은 “부처님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이 되고, 마구니 마음을 가지면 마구니가 된다”고 강조했다. 속리산(俗離山)이다. ‘산이 세속을 여의였기에’ 속리산일까, 아니면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 있기에’ 속리산일까? 일반적으로 속리산은 ‘세속을 여읜 산’이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문 문법에 따른다면 ‘세속을 여읜 산’은 ‘이속산(離俗山)’이라 해야 함에도 굳이 ‘속리산’으로 지금까지 이름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조선
청년 시절 우연히 찾은 고운사‘어디서 왔는고’ 물음에 출가 템플스테이·복지·교육 매진주지부임 5년만에 본사 위용 ▲호성 스님 7월 장맛비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나무들이 산을 타고 오르는 구름을 벗 삼아 시원스럽게 서 있다. 그 뿐이다. 눈과 귀, 입을 현혹시키는 상점이나 유흥점은 일체 없다. 고즈넉한 길만이 고운사를 향해 나 있을 뿐이다. 길은 깊어지고, 한적함은 더해만 간다. 고운사(孤雲寺)는 순례객의 참배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길 위에서 단 한번이라도 철저한 외로움을 느낀 사람에게만 도량을 내어주려는가 보다. 고독의 단견으로 끝나려는 순간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화엄일승법계도!
고운 최치원 시 탁본 계기로30여 년 금석문 연구에 매진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지내며교계 전시문화 새 지평 열어 ▲흥선 스님 “초저녁의 정밀을 사랑합니다. 마루에 서서 하늘호수를 헤쳐가는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파초 잎 일렁이는 뜰을 거닐기도 합니다. 그제서야 오롯이 나와 마주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합천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는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로 은둔한 고운 최치원의 시를 새긴 제시석(題時石)이 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상공시비성
부친에게 ‘이뭣고’ 화두받고석암 은사로 선암사서 출가 폐허 벽송사 40년 중창하며화엄도량 서암정사도 창건 ▲원응 스님 서암정사에 들어서는 순간 두 개의 돌기둥 앞에서 멈춰 섰다. 일주문을 대신 하는 두 개의 석주. 百千江河萬溪流(수많은 강물 만 갈래 시냇물) / 同歸大海一味水(바다에 가니 한 물 맛이로다) / 森羅萬象各別色(삼라만상 온갖 모습이여) / 還鄕元來同根身(고향에 돌아오니 본래 한 뿌리도다) 회주 원응 스님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구일 터. 돌에 담긴 진의를 헤아려 볼 길이 없으니 발걸음만 재촉한다. 또 다시 나타난 두 개의 돌기둥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게 한다. 석주 전후면에 각각의 글
1977년 노적사 주지 맡아35년간 묵묵히 중창 불사 부처님 진신 사리 7과 봉안적멸보궁으로 도량 대 일신 ▲종후 스님 북한산은 그 규모가 크지 않지만 명산으로 꼽힌다. 이채로운 건 백운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30여 개의 큰 봉우리가 저마다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 북한산성의 축성기록을 담은 ‘북한지’ 덕이다. 조선 숙종 당시 팔도 도총섭을 지낸 성능 스님이 저술한 ‘북한지’에 기록된 봉우리는 약40여개. 일부는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지만 사실, 북한산만큼 봉우리 이름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드물다. 명산을 중심으로 도성 곳곳에 부처님 말씀이 퍼지기를 기원했던 것일까? 석가봉, 승가봉,
수곽에서 떨어진 물에 체득월산 스님, 직접 법호 내려 상대가 있으면 걸림만 많을 뿐한 생각 접으면 경계도 사라져 ▲철산 스님 봄이다. 꽃이 피니 새가 노래한다. 아니, 꽃 피고 새가 노래하니 봄이다. 장사(長沙)도 오늘 같은 날 산을 유람했을 터. 길을 나섰다. 문경 사불산 기슭에 선 소나무도 당당하게 새순을 내어 보였다. 붉은 천에 싸인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그 네 면에 부처님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도량은 저 앞의 일주문부터가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아니 사불산 품 안 전체가 도량이리라. 신라 진평왕 때인 587년에 창건된 대승사는 역사적 유서가 깊기도 하지만 성철, 월산, 청담,
서울고 재학 때 인문학 탐구서울대 포기하고 동국대 입학 성철 스님에 한 방 맞고 출가46년 올곧이 수행에만 전념 ▲지환 스님 “네가 대자유인이 되지 못했는데 누굴 가르쳐!” 청년 철학자는 이 한 마디에 사문의 길로 들었다.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의 출가 전 일화 한 토막이다. 지환 스님은 출가 전 ‘삶’에 관심이 많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곧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로 꼽혔던 서울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가 인문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회주의가 이 시대의 해답인가를 사유해 보았지만 아니었다. 자본주의 역시 부족해 보
72년 도영 스님 은사로 출가화두 하나 들고 선방서 41년 무문관 폐문정진만도 3년 째승려대중 수행 본보기 ‘수좌’ ▲영진 스님 영진 스님은 지난 3년 동안 백담사 무금선원에 머물며 결제철이면 무문관에 들어가 은산철벽과 마주했다. 무문관이라 하면 자물쇠로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한 끼 공양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햇볕 한 줄기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폐문정진하는 곳 아닌가. 이 공간에서 생사와 사투를 벌였으니 인상도 굳어 있고, 말씨도 칼칼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선입관에 불과했다. 영진 스님은 엄한 듯 부드러웠고, 강직해 보였지만 그 속엔 자애가 묻어 있었다. 순간, 중국의 종색 선사가
열두 살 출가 보경사서 갱두·채공송광사 법흥 스님 은사로 삭발염의 진관 스님 만나 인권·민주 인식아시아 구호·교육 불사에 매진 ▲지원 스님 문수사 주지 지원스님은 현재 위드 아시아(with ASIA) 이사장이다. 세간에서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를 진두지휘했던 실무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은사는 송광사 법흥 스님. 법흥 스님이 효봉 스님의 상좌이니 지원 스님은 손상좌인 셈이다. 지원 스님은 1980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해 ‘산문에 부는 바람’ ‘이별연습’ 등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위드 아시아! 비영리 NGO 사단법인 위드 아시아(with ASIA)는 아시아 빈곤지
화두 들었어도 심적 변화 없어남방가사 입고 팔리어 경전공부 8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 수행09년 한국테라와다 ‘승왕’ 추대 ▲ 도성 스님 바람에 묻어 전해오는 솔잎 향이 싱그럽다. 기암괴석을 스쳐 지나 온 바람이 머문 숲이기에 향은 더 깊다. 산천을 유람하던 신라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한 연유도 숲에 이는 바람이 청량해서일 것이다. 부산 영도 남단에 위치한 태종대(太宗臺) 유원지 품에 태종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중에게는 ‘수국 산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인도를 비롯해 네덜란드, 일본, 스리랑카, 태국,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의 수국이 산사 경내 곳곳에 심어져 있으니, 7월이면
공부할 수 있단 일언에 출가인도철학·선불교 안목 탁월 대만서 보조선·화엄 심층연구학회지평 확대·후학양성 매진 ▲법산 스님 ‘수좌 법산!’ 아직 낯설다. 동국대 강단을 떠난지 1년밖에 안 되었으니 ‘교수 법산’이 어울릴 터. 하지만 선입관은 이내 무너졌다. “관세음보살”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미소 속에는 꽁꽁 얼어붙은 강이라도 녹일만한 온후함이 배어 있었다. 차 한 잔 따르는 손길엔 힘이 묻어났다. 수좌만이 가질 수 있을 법한 묵직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런 힘이 전해졌다. 법산 스님은 앉자마자 실상사 백장선원에서 동안거를 보내며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을 전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백장 스님의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안암동 대원암은 한영, 탄허 스님이 경전을 번역했던 곳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종림 스님은 그냥 웃을 뿐이다. 750여 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대장경 1514종의 경전, 16만5000여만 자를 한자도 빠짐없이 CD 15장에 담아낸 고려대장경 연구소. 그 수장은 종림 스님이다. 우선 고려 대장경이란 무엇인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팔만대장경과 혼돈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제일 먼저 제작한 대장경을 우리는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한다. 이 대장경은 몽골 침입에 의해 불타 없어졌고 인본(印本)만 남아있다. 후에 다시 제작한 대장경을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30년 동안 산문 두문불출스님 일상이 곧 ‘계율’ 만일 기도 20년 정진 중‘영가 장애’ 막혀 중단 실재와 실체, 망상과 마음직시하면 ‘마’ 극복 가능 아집 끊는 첫 단추는 ‘하심’인과법 알면 찰나 삶도 소중 ▲혜권 스님 ‘그대가 이미 출가했으니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서는 안 된다. 몸매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행위는 볼만하게 해야 하며, 의복은 비록 누추하나 행동거지는 단정해야 하며, 음식은 거칠더라도 먹을 만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중국 북주의 도안 법사가 후학을 위해 남긴 글이다. 담양 용흥사에 주석하고 있는 백양사 율주 혜권 스님. 주변 인물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만 놓고 보면 도안 법사의
사라호 태풍으로 집 폐허된 후 스님 뒷모습 쫓아 무작정 출가 힘든 행자시절 자비·시은 체득 초심은 복밭·원력은 삶의 기둥 ▲일면 스님 1959년, 한가위 하루 전. 한반도에 강력한 태풍이 몰아쳤다. 사라호 태풍. 사망·실종만 800여명.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은 이미 폐허. 걸망 지고 길을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슴 뭉클했다. 따라 나섰다. 메고 있던 책보는 벌써 마루에 내동댕이쳐진 상태. 스님 따라가 보니 작은 절. 잠시 있다 큰 절로 향했다. 해인사 도착해 ‘스님 되겠다’ 하니 어리다고 받아주질 않는다. 13세 소년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심부름이라도 거들었다. 밥도 지었
스님 봇짐 들어주다 절집 당도 좌선 수좌 멋져보여 출가 결정 결핵판정 이후 일본 유학 포기 해인사 방부 들이고 화두 참선 ▲일수 스님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밤, 선실에 홀로 남았다. 거센 비바람에 대나무가 요동쳤다. 댓잎 부딪치는 소리를 따라 갈등과 번민으로 들끓던 지난날들이 스쳐갔다. 일수 스님은 세납 23세에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유년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너무도 크고 깊은 내리사랑을 주었던 할머니가 중학교 2학년 때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이었다. 공부는커녕 학교조차 가기 싫었다. 무덤에 찾아가 울다 잠들곤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는 정성을
‘정토삼부경’ 인연 지은 후원효·신란 정토 핵심 연구 붓다에 대한 믿음 확고해야염불신심 요체 제대로 파악 ▲효란 스님 “부처님의 빛을 비로소 빛내겠다(초휘불일·初輝佛日)”고 자칭한 신라 고승! 화쟁사상을 통해 피폐해진 민초들의 삶에 희망을 전하며 새로운 땅을 일구려 했던 스님, 원효대사! 아홉 살에 출가한 일본의 신란(親鸞) 스님. 득도일에 벌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득도 하던 날. 스승 지엔(慈圓)은 “저녁이고 시간도 늦었으니 득도식은 내일로 하자”고 말했다. 이에 소년이 노래로 답한다. “내일이 온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벚꽃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밤중에 폭풍우가 불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득도식은 그날
전장서 살아온 건 부처님 가피불법 널리펴는 ‘심부름꾼’ 서원 광덕·성철 스님 만나 불교 눈떠직장 은퇴 후 육순에 정식 출가 ▲한탑 스님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부처님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는 명호다. 법장 비구는 청정국토 원력을 세우고 보살행을 실천하며 48대원을 성취해 아미타불의 명호를 얻게 되었다. 무량광불로서 지혜광명을 상징하는 아미타부처님이기에 그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모두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염불행자가 부르는 명호가 ‘아미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사수법회 회주 한탑 스님을 찾아뵙고 ‘아미타’ 세계의 진수를 들어보고자 담양으로 향했다. 고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님은
심장병에 천식. 숨소리 크니 도반 정진에 불편. 대중생활 접고 토굴 생활.선열 속에 그리지 않았으니 내 그림 ‘선화’ 아냐.언행 살펴 고쳐 나가는 게 수행.선택 했다면 절박함으로 다가가라.예단은 필요 없고, 평가는 두려워할 게 아니다. ▲일장 스님. 낸시 함멜의 시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 때 나는 서쪽으로 난 길을 택했다. 길은 유년기의 숲에서 성공의 도시로 이어져 있었다.’ 샤르트르가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라 한 것처럼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출가도 선택이다. 그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