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이미지 응축한 문자 눈길대리석-벽돌 색감 효과도 압권 돌을 깍고 자르는 육중한 기계 앞에서도 미소를 보이는 작가. 그의 심성 속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균형있게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답지 않은 푸근한 날씨다. 이렇게 춥지 않은 겨울날은 어쩐지 행운 같다. 한 해의 마지막으로 마냥 기울어가는 시점에 몇 차례 약속을 다시 정한 후에야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올해 마지막으로 찾아나서는 이 길에 여전히 채한기 기자와 함께 했다. 그간 법보신문에 ‘불교미술인을 찾아서’란 코너를 함께 하면서 우리는 적지 않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다녔다. 다행히 이 춥지 않은 겨울날 양평을 지나 용문에 있는 지평이란 곳에 위치한 이수천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이름이 너무 크고 깊어
바퀴살 → 광배·톱니바퀴 → 연화좌‘쇠’에 불성 심은 작가의 선기 탁월해 전철문 조각가의 해맑은 웃음이 만물에 배이는 순간 그것들은 '부처'로 나툰다. 가랑비가 내리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용인에 위치한 장욱진미술관에서 갔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이 단비에 모든 자연이 마음껏 적셔 들어간다. 물기를 받아들이면서 싱싱하게 피어오르는 생명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부산하다. 장욱진이 말년을 보낸 이곳은 지금 유족들에 의해 아담한 미술관으로 환생했다. 그를 기리는 발길이 추억처럼 찾아와 그의 체취가 묻어있을 건물 이곳저곳에 걸터 앉아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이곳 자그마한 전통 한옥과 그 옆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집을 오가면서 먹고 자고 그림을 그렸다
작품 '불보의 세계' 종이에 먹 29.5 x 1025 80년대 초 박대성의 산수를 처음 보았을 때는 서양화에서 이원희의 초기 풍경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유사한 느낌이었고(둘 다 대구 화단출신이자 한국적 정취가 가득한 풍경화라는 점에서 밀접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그림을 좀더 접하게 되면서 점차 강도가 올라가 권옥연의 인물상이나 권진규의 자소상, 오윤의 목판화, 육명심의 사진 백민시리즈 등을 만났을 때와 같은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들은 내게 일종의 ‘경계’에 해당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업이 기준점이 돼서 이전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그림들과 차별화되는 안목을 키웠고 질적인 차이를 읽을 수 있는 눈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에
강행복 판화가는 작업실에서 108배를 올린다. 그러나 작업이 안될때면 송광사에 머물며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후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다. 그의 작업 손길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사진=채한기 기자 강행복! 이름이 좋다. ‘행복’이란 그 이름부터 물었다. 부친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란다. 옛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나 존재를 구분하는 기호의 성격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생애에 몇 차례에 걸쳐 이름이 달리 불려지기도 하고 세속의 이름을 지운 자리에 신선의 이름 같은 호가 붙기도 했다. 그럼, 작가의 부친은 아들의 어떤 행복을 기원했을까? 단순 상투성 도상 벗어나 전라도 광주 방림동 시장 근처의 주택가 길가에 위치한 건물 3층에 자리한
만다라. 250X250cm 흙벽에 채색. 근자에 다소 ‘이상한’ 동양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분명 산수화나 사군자, 민화 및 탱화 등 전통적인 동양화(종교화) 형식을 이용하고 있지만 이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묘한 균열과 차이가 드러난다. 산수화를 조각으로 만들거나 전통 산수화 안에 도시 풍경이 섞여 있다거나 거문고 대신 노래방기구를 갖다 놓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민화 속 도상들을 입체로 만들어 공간에 설치화 시킨 경우 등이 그 예다. 이른바 퓨전동양화라고나 할까. 동시대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전통(이미지)은 새롭게 해석될 것들이고 또 다른 의미와 상상력 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할 오브제에 해당하는 것 같다. 전통-현대도 생멸거듭 이전 세
불교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서 비롯된다. 드라마 없이 사물, 대상을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들은 사물을 저마다의 인습, 편견, 교육, 학습되고 경험화 된 것들을 통해 자기 식으로 보고 착각하며 곡해한다.주어진 세계를 편견 없이 바라보기란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다. “그림은 나의 일기” 이인숙은 자신의 그림을 일기에 비유한다. 홍천에 살면서부터 주변 자연에서 보낸 일상의 체험, 그로부터 발원하는 자기 생애의 반추와 자연에게서 일러 받는 깨달음, 그로부터 파생하는 여러 감정과 느낌 등을 화면에 불러들여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려내고자 한다. 주변 환경과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생명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을 그림
안창홍 화가의 작품 속에는 환멸과 열반이 공존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관조’를 당부하고 있다. 양평에 위치한 안창홍의 작업실은 이미지의 보고다. 작가의 감각적인 손에 이끌려 나온 수많은 이미지들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손이 빠르고 화려하며 감각적인 시각연출에 능란하고 몽상과 환각적 연출에 뛰어나다. 자기 생각과 환상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괴이하며 섬짓하고 음울한 이미지를 축제처럼 그림 안에 녹여낸다. 너무 환하고 밝고 강렬하게 그려진 공포와 징그러움은 기이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하다. 거의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꿈대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그 그림들은 기획이나 개념, 이론과는 다소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의 몸에서 발아해서 움터
노정용 작가는 “선조들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는 새로운 현대 감각의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노정용의 작업실은 화훼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 한 켠이다. 연탄 난로의 온기에 장미나 백합, 이런저런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난로의 팬에서 나오는 주황색 열기와 점토와 석고, 폴리코트로 떠낸 온갖 석물과 조각상들이 빼곡히 밀집해 있는 풍경이다. 냉랭한 공기가 가득한 허름하고 다소 어지러운 이 비닐하우스 안은 온갖 작품들과 자료들이 밀집한 창고에 다름 아니다. 작업실엔 박물관 정취 물씬 지하철 삼송역 근거리에 위치한 이 작업실은 도로 변에 위치한 여느 비닐하우스와 차이가 없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흘려버릴 작업실이다. 그러나 그 안의 장소는 치열한 작업의 현장임을 알리는 잔
김양동 서예가는 순박하고 빛바랜 질감을 작품에 투영시켜 왔다.사진=채한기 기자 천년의 세월 한지에 스민 듯 고졸한 멋 속엔 ‘생멸’이 꿈틀 김양동은 서예와 전각, 시와 그림, 도판화 등으로 이룬 이미지를 통해 동양 문화의 사유세계, 정신과 종교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표현을 추구한다. 문장과 서예, 전각과 그림이 모두 하나로 통합된 이 같은 작업의 예는 찾기 어렵다. 아울러 유. 불. 선과 동양고전문화와 전통, 그 사유의 깊이와 폭을 하나로 아우르는 작가 역시 드물다. 아직도 문인화가 가능하고 문인이 가능하다면 김양동은 그에 가장 근사(近似)한 작가일 것이다. 그러니까 근대 이후 서구를 통해 받아들인 장르로 분화되고 특화된 미술개념과 그에 기반 한 작가상에서 벗어나 통합적이고 전인적이랄까
고구려 무덤 미술서 우리 문화 정수 인식 끝없는 ‘나’ 탐구 통해 새로운 미학 창출 그의 외로운 여정 수행의 길과 맞닿아 최근 도학회는 일본 법륭사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번안해 재현했다. 기계적인 모방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관음보살상을 원래의 사상적 측면으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약간의 변형, 그러니까 작가의 자의적 상상력을 가해 만든 것이다. 현실기복만이 강조되는 데서 벗어나 수행자의 측면을 강조한 형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조각의 전통을 찾아나가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관음보살상, 관음신앙을 만났다고 말한다. 얼마 전 일본에 가서 법륭사 관음보살상 앞에서 꽤나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 매력에 한껏 도취되었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이인 화가는 현재 서울 인사동 ‘가람’화랑에서 ‘색색풍경’전을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11월 30일까지 열린다. 사진=채한기 기자 종이 위에 색과 먹을 가지고 무심하게 놀듯, 유유자적하듯이 그려낸 그림들이다. 아이들 그림 같은 그림이 지극한 경지임을 화가들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일정한 교육과 관습화된 몸을 지닌 후 그런 경지로 되돌아가기는 바늘귀에 낙타가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많은 화가들은 자신이 배웠고 몸에 익은 것들을 어떻게 하면 털어내고 비울 것인가를 갖고 애쓴다. 인생의 절반을 들여 애써 배우고 나머지 삶의 반은 배운 것을 가능한 지우고 잊어버리고자 하는 셈이다. 이 아이러니가 바로 예술의 길이다. 그것은 익히고 배워야 하면서 동시에 부단히 지우
요철 효과로 리듬 부여 흑연으로 육화한 자국에 인연-억겁의 시간 농축 그려서 드러내기 보다 감추고 가라앉혀 무욕의 경지 표현 이영희의 아파트(작업실)에서 나는 검은 그림들을 보았다. 아파트 거실과 딸린 방은 그림들로 가득하다. 불편한 손/몸으로 행한 지독한 그리기의 결과물들은 그렇게 검었다.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했으며 단청장 이수자이기도 한 그는 오랫동안 불교적 사유를 그림 속에 용해해내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스님의 가사, 부처님의 의습, 한 방울의 물 등을 끌어들여 이를 형상화한다. 다만 모든 것은 짙은 어두움, 검정 속에 가라앉아 떠오른다. 그의 화면은 온통 깊고 아득한 검정, 짙은 회색 혹은 검정 색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미묘한 색상의 층으로 가득 덮여있다. 작가는
동양전통 간직한 골동품에 심취 신화-야생-대칭의 조화 돋보여 김광문이란 작가는 무엇보다도 손이다. 그의 손에 의해 모든 사물들은 새롭게 환생한다. 그의 손은 거미줄처럼 존재하다가 문득 낚아챈 물건들을 자기 감성과 조화의 논리 아래 재배치한다. 이 연결과 접목에는 각 사물들간의 오행과 사주, 역학과 주역의 이치에 따른 배려가 놓여있다. 그는 각 사물들의 존재성을 그렇게 동양의 전통적인 운명론의 헤아림과 통찰에 의해 파악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을 통해 사주와 점보는 일, 산통과 주역공부, 부적과 불교의식 등을 자주 접촉하면서 자랐다고 말한다. 아울러 어머니를 통해서는 한의학이나 침놓은 일 등도 목도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러한 경험과 이미지 체험들이 훗날 자신의 작업세계를 규정해주었음을 말해주었다.
돈황서 동거동락 7년 500여개 석굴 벽화서 용필-착색법 체득해 현대미감으로 재 탄생 모사하며 1000년 전 화공과 교감 강렬·여운의 매력에 흠뻑 젖어 서용 화가는 돈황벽화를 재해석하며 창작으로 연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사진= 채한기 기자 90년대 초에 나는 한국화가 몇 분과 함께 중국여행을 떠났다. 황산과 계림 등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는데 이 여로에서 서용이란 작가를 만났다. 이전까지 나는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초면이었고 낯선 이었다. 첫 인상은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안경을 쓰고 짧은 콧수염이 삐죽나 있던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돈황 벽화를 연구하고자 그곳을 수차례 답사하고 아예 그곳에서 적지 않은
만다라는 내 마음의 고향 빈 캔버스 내놓을 때 나의 그림은 완성 전성우(71세) 화백은 “붓질 할 때마다 나의 번뇌도 털어지길 기대한다”며 “빈 캔버스를 당당하게 내 보일수 있을때 나의 그림도 완성된 것”아라고 말했다. 현재 가나아트센턴에서 ‘전성우 50년의 발자취’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회는 6월 19일까지. 02)720-1020 만다라는 수행을 통한 성불의 의지를 가시화 한 도상이자 질서를 말한다. 색채와 형태의 기본적인 결합체로서의 이 도상은 치밀한 작도와 꼼꼼함 마무리 속에서도 놀라운 회화성, 예술성을 간직하고 있다. 만다라는 보는 이의 시각적 사실로는 결코 가늠하기 어려운 심오한 상징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다라는 종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만다
사진작가 주명덕씨는 의미부여 이전에 직감으로 대상을 촬영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의 직감에 선기가 어려있다. 주명덕은 불교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다. 성철큰스님을 찍은 사진뿐만 아니라 사찰과 관련된 수많은 사진을 통해 불교이미지를 사진으로 가장 탁월하게 해석하고 있는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자신은 불교와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불교란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보편적으로 내면에 깊게 자리한 미의식과 문화적 기호, 취향과 관련되어 있기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인이기에 가능한 사진을 찍은 것뿐이라는 얘기다. 간혹 스님들은 그에게 자신들 보다 더 불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에 그런 사진이 나온 것 아니냐고 반문하곤 했다고 한다.
석굴암 본존불 재현에 여념이 없는 손연칠 씨는 "김대성의 꾸짖음을 듣고 있다"고 말한다. 그 꾸짖음은 "보살도를 행하라"는 것이다. 손연칠은 동국대학교 불교미술과 1회 졸업생이다. 대학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하고 또한 부처님을 만난 그는 이를 선택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불교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독자한 조형체계 속에서 융화해내려는 다양한 시도를 선보여온 작가로 기억된다. 인간문화재인 석정 스님에게 불화를 사사했으며 오랫동안 불화 연구에 몰두했다. 불화를 연구하면서도 단지 불화를 그리는데 급급해하지 않고 이 땅의 수많은 불상을 연구하면서 한국 불타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경주서 신라미술 체현 불화의 현대화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그의 고민인 셈이다. 불
불가와의 깊은 인연 속에서 태어났고 늘 그 주변에서 함께 한 삶을 살아왔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어린시절에 발심한 초발심을 그대로 유지하여 만해 한용운 스님 연구를 평생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인연에 늘 감사함을 느낀다. 만해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는 늘 옹달샘처럼 싱그럽다. 그러므로 부처님 자애로운 은혜 속에서 살아온 내 삶은 그대로가 축복과 은혜의 삶 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한 인연의 줄기가 강릉포교당(관음사)에서 시작되어 오대산 월정사 탄허스님 밑에서 화엄경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과 사천 곤명의 다솔사에서 효당사를 모시고 금강삼매경을 수학하던 시절의 인연, 그리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석주스님과의 인연으로 칠보사에서 법회를 지도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
무심히 그려넣은 선 깨달음의 정점인 듯 적멸의 순간인 듯 부처의 미소는 화두다 모든 미소의 절정이며 모든 미소의 극치다 김은현이 도조로 만들어 놓은 인물상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만들어지고 조각된 것이라기 보다는 살아서 몽상에 잠긴 듯한 미소다. 미소란 사전 정의에 의하면 “소리내지 않고 가볍게 웃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을 표출한다. 눈, 입, 관자놀이, 입아귀 등이 관련된 신체적 움직임인 미소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인간적인 표현일 것이다. 인류가 가진 특수한 기호이자 사람들마다 고유하게 나타나는 표현인 미소는 언어와는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인류가 가진 특수한 기호 침묵 속에 감춰져 있는 바를 무언의 표정으로 드러내는 미소는 살아가는 내내 우리
유랑적 기질을 발휘하여 시간만 나면 쏘다니곤 해서 계절에 따라 두어 번 들른 곳도 여럿 있건만 어찌된 셈인지 해인사는 그 뒤에 다시 가보지 못했다. 대학 4학년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12월의 끝이었다. 진학을 하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고 그나마 마음을 다잡았다. 겨울에는 물론이고 여름에도 늘 볼이 발그레해 연꽃 같았던 불심 깊은 선배가 소개해주어 해인사를 찾을 수 있었다. 잘 아는 스님이 해인사의 회계 스님으로 내려가 계신데, 찾아가면 원하는 만큼 묵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 기억에는 그해 겨울도 여기저기 얼음이 꽝꽝 얼고 고드름이 추녀에 드리운 매서운 추위였다. 동안거에 들어간 산사의 한적한 경내에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던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