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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짙음-관능의 선[br]상호의존 속 꿈틀거리다[br]이내 無로 돌아가

기자명 법보신문

화가 이 영 희

요철 효과로 리듬 부여
흑연으로 육화한 자국에
인연-억겁의 시간 농축

그려서 드러내기 보다
감추고 가라앉혀
무욕의 경지 표현


이영희의 아파트(작업실)에서 나는 검은 그림들을 보았다. 아파트 거실과 딸린 방은 그림들로 가득하다. 불편한 손/몸으로 행한 지독한 그리기의 결과물들은 그렇게 검었다.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을 전공했으며 단청장 이수자이기도 한 그는 오랫동안 불교적 사유를 그림 속에 용해해내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스님의 가사, 부처님의 의습, 한 방울의 물 등을 끌어들여 이를 형상화한다. 다만 모든 것은 짙은 어두움, 검정 속에 가라앉아 떠오른다.

그의 화면은 온통 깊고 아득한 검정, 짙은 회색 혹은 검정 색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미묘한 색상의 층으로 가득 덮여있다. 작가는 아교를 매개로 섞어 흑연 가루를 화면에 밀착시켰다. 그래서 화면은 반질거리는 검은 색, 미묘한 느낌으로 꽉 찬 짙은 회색과 절대적인 검정 사이를 가로지는 듯 오묘한 분위기의 색상으로 가득 물들어있다. 또한 그것은 빛의 각도에 따라, 보는 이의 시선의 차이와 조명에 따라 이채로운 색의 파장을 은은하게 번져낸다. 그것은 마치 어둠을 뚫고 번져 나오는 한 줄기 빛에 다름 아니다.

화면은 잠시 보는 이의 망막을 망연하게 만든다. 납작한 평면에 견고하게 밀착된 이 색채의 층은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린다. 그러한 잠시 그 속에서 희망 같은, 빛 같은 선을 얼핏 보여준다. 아울러 화면 안에는 여러 시간과 공간이 켜켜이 내장되어 있다. 문득 어떤 색이 연상된다. 색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이며 나아가 기억에 저당 잡힌 상징이다. 또한 색은 문화적이다. 그 색은 그을음, 재, 연필의 색, 스님의 가사(袈裟)를 연상시킨다. 스님들은 검정 물감이나 땡감으로 물들인 검은 베옷을 입는다. 그것은 가장 검소한 복색이다. 검정 물을 들인 승려의 이 옷을 흔히 치복(緇服)이라고도 부른다. 이 검은빛은 원래 사람을 끄는 색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연소, 휴지(休止)와 같은 심적 상황을 암시한다. 검박하고 소탈하며 모든 색을 포용하는 색이다. 작가는 불교미술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검은 색채는 불교적 색채 관을 은연중 드리운다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이 화재로 인해 전소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온통 검은 색, 잿빛으로 가득 찬 진화 현장에서 작가는 검은 색(잿빛)에 깊이 매료되었단다. 모든 것들이 다 죽고 소진되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남은 주검들이 결국 검은 색, 잿빛으로 마감되는 찬란한 파국의 현장이 그것이다. 폐허와 절멸의 공간을 감싼 검은 색이 주는 힘과 기이한 매력이 불교적 색채로서의 검정과 맞물려 지금의 작업 세계로 견인되어 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그렇게 만든 견고한 어둠의 화면에 부드럽고 관능적인 선들을 짧게 그어놓았다. 작은 화면들이 잇대어져 만든 이 모자이크 화면에는 여러 관계를 암시하는 무수한 선들이 제각기 다채롭다. 짧게 마감된 선은 약간의 요철효과로 부조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표면에 섬세한 리듬과 흐름을 부여한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의습에서 따온 선들이다. 그러니까 옷자락의 여러 표정들인 셈이다. 부처의 육신을 덮고 있는 옷이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내려와 자연스레 이룬 선들의 자취를 쫓아 그려놓았다. 그렇게 올려진 선은 이제 그 자체로 자존한다.

아울러 작은 화면 안에 부분적으로 들어온 이 의습은 서로가 연결되어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부분은 각기 개별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며 참조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해 얽혀있고 연루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 각각은 고유한 생애를 지닌다.

그런가하면 종이의 피부를 흑연으로 육화한 이 자국은 끊임없이 바탕을 지우고 덮고 가린 시간의 응축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면서 동시에 지우고 표현하면서 결국 그림을 버리는 행위이다. 칠하는가 하면 그리는 것, 그리는가 하면 지우는 것, 시간과 몸을 개입하고 기입하면서 아울러 그 모든 흔적, 인연을 무로 돌려버리는 것 말이다. 결국은 자신의 신체적 행위, 수고로운 노동과 집약된 시간의 두께를 읽게 하는 그림이다. 그래서인지 마치 맹렬한 수행과 자기 깨달음을 독려하는 매질 같은 시간의 겹이 느껴진다. 그래서 화면은 엄정하고 가늠하기 어려운 무수한 시간의 자락들만이 헤엄치고 있다.

나는 온통 어두운 화면에서 미세한 자취, 상처 같은 균열을 찾으면서 동시에 그 시간의 자락을 뒤따라 가본다. 아울러 작은 화면(작은 시간)마저도 사실은 여러 조각들이 무수히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작고 파편적인 사건들이 은닉되었던 것이다. 측량 할 수 없는 시간의 저장, 엄청난 공력으로 마감된 화면은 서로 불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충만하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고 작은 것들의 집적 없이 큰 화면은 가당치 않다는 얘기다.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경지다. 보이는 것 같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화면은 무엇을 그리거나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안으로 거듭 가라앉힌다. 그러니까 그것은 발산되기보다는 침잠되며 시각적이기보다는 비(반)시각적이다. 망막에 반하거나 망막을 곤경에 빠트린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 화면은 어떤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거나 명명하기보다는 무명으로, 무욕으로 마냥 가라앉히는 편이다. 한 눈에 결코 포착되기 어려운 화면, 쓰윽 하고 보아 넘겨서는 많은 것을 놓치는 화면이다. 보고 또 보고 찾고 또 찾는 그런 눈을 요구한다.

즉물적이고 현상적인 눈이 아니라 어둠과 짙음 안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줄 아는 그런 눈, 마음의 눈을 재촉한다. 그 마음의 눈이 그가 불교에서 배우고 익힌 눈이다.

(미술평론,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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