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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도 학 회

기자명 법보신문

석굴암-관음보살상 친견 후
우리 조각의 진경 발견

고구려 무덤 미술서
우리 문화 정수 인식
끝없는 ‘나’ 탐구 통해
새로운 미학 창출
그의 외로운 여정
수행의 길과 맞닿아


최근 도학회는 일본 법륭사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번안해 재현했다. 기계적인 모방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관음보살상을 원래의 사상적 측면으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약간의 변형, 그러니까 작가의 자의적 상상력을 가해 만든 것이다. 현실기복만이 강조되는 데서 벗어나 수행자의 측면을 강조한 형상이 그것이다. 작가는 조각의 전통을 찾아나가다 보니 동·서양 문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관음보살상, 관음신앙을 만났다고 말한다.

얼마 전 일본에 가서 법륭사 관음보살상 앞에서 꽤나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 매력에 한껏 도취되었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대단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우리 전통문화를 보편적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며 동시에 조선시대의 진경산수처럼 조각의 진경을 찾는 일 역시 병행하고자 한다. 그런 탐구와 모색이 자연스레 우리네 전통조각, 불상조각에 가닿았고 거슬러 올라가 인도조각, 이집트와 그리스 조각까지 아우르면서 결국 그 모든 조각세계와 만나고 합치되는 광활한 영역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한 복판에 관음상이 놓여있다. 그래서인지 도학회는 자신을 소개하는 이력의 글을 매우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약 23,000년 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에서 현생인류로 태어났다. 기원전 3000년 전에는 이집트의 무덤을 장식하는 장인이었다. 기원전 1000년 전에는 조선국 제사장의 시종이었다. 기원 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조각가로 일했다. 4세기 인도의 조각가였다. 5세기에는 신라에서 어린나이에 순장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백제의 도미부인의 시종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6세기에는 고구려에서 고분벽화를 그리는 화가이기도 했다. 7세기에는 일본에서 백제계통의 목조장인이었으나 고구려에서 온 담징의 권유로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8세기에 석굴사를 만드는 석공이 일원으로 일했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다. 그 이후 한동안 환생을 하지 않으며 천계에서 수행하였으나 천녀들을 희롱한 죄로 다시 인간으로 탄생하였는데 과거의 동주가 그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두 명의 인간으로 분화해서 태어났다. 한 명은 조각가 도학회이며 분화된 다른 인물은 어느 암자에서 죄업에 대해 속죄하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게 작가 자신을 묘사한 이력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대목에 그가 추구하고 있는 작업의 세계가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 글안에는 무수한 인연에 따른 전생의 내력과 모든 문화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 녹아있다. 그러니까 그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최초의 조각상)를 만들었던 이였으며 이후 이집트, 그리스를 거쳐 인도(간다라양식)로 건너와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한반도로 와서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사신도)를 그렸고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법륭사 관음보살상을 만들었고 다시 신라로 와서는 석굴암을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흘러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미켈란젤로의 조수로 활동하면서 사실적인 조각양식의 정점을 추구하다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오늘날 다시 이 땅에 환생했다는 것이다. 이 상상력과 몽상은 기실 조각가 도학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과 탐구 및 한국조각의 정체성 궁구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불거져 나온 데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최근 자신의 작업 주제어로 ‘동주’(東住)라는 표현을 썼다.

‘동양의 물을 끌어들이다’는 의미를 지닌 이 말은 원효와 얽힌 이야기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알다시피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무덤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난 후 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귀족적이고 난해한 교종불교 대신에 민중적인 불교를 설파했고 실천했다. 도학회는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무덤이 바로 고분벽화가 있었던 고구려고분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고구려무덤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상상되는 원효의 자각과 동일한 맥락에서 고구려 무덤의 뛰어난 미술(이미지)에서 과거 우리미술문화의 정수를 깨닫고 나아가 석굴암과 같은 불교조각에서도 비로소 서구조각의 세례에서 벗어나 우리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 본인의 자각에 대한 중의적 수사인 셈이다. 작가는 그런 경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왜 동주라는 표현을 썼으며 관음보살상의 현재적 재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관음신앙과 관음보살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등에 대한 의미심장한 단서가 놓여있음을 만날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지금의 육체에 속한 하나의 정신체가 전부일까? 동주는 불교의 윤회처럼 많은 거듭남을 해왔다. 경우에 따라서 두 개 또는 그 이상으로 분화되기도 했다. 이 분화된 나의 상태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하고 가치관이 혼돈되게 하는 원인은 아닐까? 불교의 깨달음처럼 ‘분화된 나’가 다시 하나로 결합(복구)될 때 내가 쏟아내는 많은 모순된 말과 행동들이 치유되고, 나의 미학이 정립되는 것은 아닐까? 동주의 ‘분화된 나’들은 통합되고 소멸되어야 할 상대적 개념들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균형을 이루는 공존의 개념이며, 분실된 것을 찾는 정신적 행동이다. ‘나’라는 그릇의 원래 형태를 복구시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생겨난 것일 수 있으나 누군가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나’들은 서양에도 있을 수 있지만 동양에도 있다. ‘나’들은 먼 과거에 머물고 있는 것도 있지만 세상의 종말에 가까이 가 있는 것도 있다. ‘나’들은 내 속에 있을 수 있지만 ‘당신’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관음보살상을 통해 우리 조각의 진경을 얼핏 만나고 나아가 동·서양조각문화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도학회의 여정은 마치 선승이 수행과도 같은 길을 가는 한편 조각가의 길 역시 진리를 찾는 수행에 다름 아님을 일러준다.
(미술평론·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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