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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서 용

기자명 법보신문
돈황서 동거동락 7년
500여개 석굴 벽화서
용필-착색법 체득해
현대미감으로 재 탄생

모사하며 1000년 전 화공과 교감
강렬·여운의 매력에 흠뻑 젖어


서용 화가는 돈황벽화를 재해석하며 창작으로 연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사진= 채한기 기자

90년대 초에 나는 한국화가 몇 분과 함께 중국여행을 떠났다. 황산과 계림 등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는데 이 여로에서 서용이란 작가를 만났다. 이전까지 나는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초면이었고 낯선 이었다.

첫 인상은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안경을 쓰고 짧은 콧수염이 삐죽나 있던 까무잡잡한 얼굴에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돈황 벽화를 연구하고자 그곳을 수차례 답사하고 아예 그곳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살다 온 이다. 아마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돈황에 대해 정통하고 돈황 벽화의 의미와 불교미술의 정수에 관해 가장 해박한 화가가 바로 그일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국내에 귀국해서 돈황 벽화를 응용하고 해석한 본인의 개인전시를 열었다. 나는 뒤늦게 그의 그림을 보았다. 그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의 두께와 경험의 결실들을 비로소 접했다.

그의 회화는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척박한 장소인 서역의 막고굴에서 약 7년 동안 작업해 온 것으로, 돈황 벽화를 임모하는 작업에서부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임모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돈황벽화를 차용하되 재구성하여 변형하거나 하나의 화폭에 임모와 창작을 혼용하는 작업이며, 창작에 기반한 작업은 임모작업을 선행한 후 이를 부분적으로 갈아내어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이 위에 새롭게 그린 것이다. 두 가지 작업 모두 전통적인 돈황 벽화의 재료기법 방식에 기초한 것으로 고대 벽화를 느끼고 그 기법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벽화의 재현과 변용을 통해 우리의 근원적 미의식에 기초한 작가의 생각을 또한 읽을 수 있었다.

서용은 왜 돈황에 갈 생각을 했을까? 한국의 회화사는 사실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발원한다. 고구려 벽화의 재료기법 안에는 회화의 모든 원리와 한국 미술의 자생적 요체가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국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벽화를 알아야 하고 나아가 고구려 고분벽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인 돈황 벽화를 알아야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우리 그림의 시원임을 밝히기 위해 돈황에 간 것이다. 돈황 벽화를 모르면 중국미술을 알 수 없고 불교미술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아울러 한국미술이 대부분 불교미술인 상황에서 돈황 벽화를 공부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 전파되고 발효된 불교 미술의 본 모습을 또한 정확히 헤아리는 중요한 방편임은 부정 할 수 없다. 그래서 서용은 돈황에 갔다. 돈황에 여행을 갔다 온 이들은 적지 않지만 돈황에 가서 살면서 공부하고자 한 것은 그가 본격적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동양벽화의 재료기법을 가장 정통적으로 연구한 화가일 것이다. 그리고 불교미술의 시원에서 그 본래의 모습을 익혀 우리 불교미술의 전래과정을 또한 소상히 밝혀온 것이다.

일 년 강우량이 37ml에 증발량 2500ml로 아주 건조한 중국의 서북쪽 고비사막 안에 위치한 오아시스의 도시이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서양과 통하는 길목이자 중국 땅의 시작이자 끝이 다름 아닌 돈황이다. 그곳에 중원의 난을 피해 지식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사회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고, 실크로드라는 지정학적 특징에 의해 서역에서 승려들이 들어오고 불학이 연구되면서 돈황에 축적되고 있던 경제력이 석굴사원을 조성하는데 쓰여 돈황석굴이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탄생한 것이다.

돈황 문물은 청나라 광서 26년(1900년)에 거의 1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막고굴(속칭 천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른바 장경동(막고굴 제17굴)에서 찾아낸 장서는 무려 3만여 권이며, 현존하는 막고굴 벽화는 4만 500m가 넘고, 채색 소상도 3000여개가 넘는다.

돈황 석굴은 건축, 조소, 벽화라는 3개 장르가 결합된 종합예술품이다. 무엇보다도 돈황 벽화가 그중 으뜸이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미술이 실크로드라는 무역로를 거쳐 서역을 통해 중국에 들어와 돈황에서 꽃을 피웠다. 오랜 시간동안 서역과 중원의 예술형식이 종합되어 독특한 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돈황벽화는 서역에서 들어온 불교문화가 중국 서북지역의 토착문화와 융합하면서 나타난 예술형식이며, 여기에 동쪽의 한족 문화가 유입되면서 안정되고 세련된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돈황 석굴 내부에는 거대한 변상도와 각종 불교 이야기 그림이 빈틈없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 부분은 각종 장식도안화로 장식하여 독립된 화려한 불국 세계로 꾸며졌다. 돈황 벽화가 다른 여타의 중국 석굴과 구별되는 점은 10개 조대에 걸쳐 1000여 년 간 조성되어 시대별 특징을 한 눈에 보여 주며, 벽화의 내용 면에서도 다른 석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특징을 지녔다는 점이다. 돈황 벽화는 무엇보다도 불교사상 선양을 위한 것이었다. 벽화 내용도 당시 유행했던 불교사상을 반영했으며, 벽화의 표현형식 또한 불교사상이 표현하려는 내용과 소재에 따라 부단히 변화했다. 총체적으로 보면 돈황 벽화의 표현형식은 존상화에서 설법도, 고사화로 발전하며, 이것들은 다시 경변화로 발전한다. 돈황 벽화의 내용을 크게 분류해 보면 불상화, 고사화, 전통 신화 소재, 경변화, 불교사적화, 공양인 화상, 장식도안 등 7개로 나뉜다. 그런 면에서 돈황 벽화야 말로 불교미술의 보고이고 한국불교미술의 근원이다. 이곳을 제대로 알아야 한국의 불교미술의 면모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서용은 그런 의미에서 돈황 벽화를 중요시하고 이를 학습했다. 자연스레 불교공부와 역사공부가 병행되었고 재료와 기법 연구가 뒤를 따랐다.

서용은 500여개에 달하는 석굴 안 벽화들을 하나하나 그려가며 내용과 필법을 연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생명을 잉태해 온 벽화 하나하나에는 강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있고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손바닥만한 벽화 한 부분에도 현대미술에 견줄 수 없는 특이함이 배어있다고 한다. 작가에게 돈황은 단순히 그림 공부에 적합한 공간이기 이전에 정신없이 떠밀리거나 떠밀려 살아야 했던 데서 벗어나 재촉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가는 구도의 현장에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직접 찬거리를 사다가 끼니를 해결하고, 야시장 양고치구이에 입맛을 들이면서 7년 가까운 시간을 돈황과 동거동락하면서 보낸 그는 반 돈황사람이 다 되었다.

우선 그는 돈황벽화를 임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길들여진 습관들을 털어내는 한편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전략이었다. 물론 그 임모과정은 시간을 넘어서서 1000년 전 화공들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고 그들에게 육성으로 용필법과 착색법을 일러 받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돈황 벽화는 그에게 가장 큰 스승이고 자상한 선배였다고 한다. 특히나 사막에 위치한 이 돈황은 사막 특유의 매혹적인 공간의 힘과 부재의 미학을 영성적으로 전달해주었다고 한다.

오랜 임모과정과 함께 그는 돈황 벽화를 재해석하고, 이를 다시 창작으로 연결해 보려는 다양한 시도를 펼쳐보였다. 무엇보다도 돈황 벽화의 찬란함과 돈황 땅의 기운을 어떻게 그림에 담아둘 것인가가 그의 최대의 과제였다. 사실 그 같은 추상적인 느낌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현재 한국의 많은 화가들이, 학생들이 서양을 향해서 또는 소중한 가치를 잃으면서까지 현대를 향해 치달을 때, 오히려 뒤로 돌아서서 동양의, 그리고 1500여 년 전의 과거의 한 벽화조각에서 진정한 예술을 발견하고 흥분했던 이다. 그에 의해 불교미술은 거듭 태어나고 있으며 특히나 돈황이란 보고가 오늘날 새로운 미감으로 새롭게 환생되고 있음을 만날 수 있다.

(미술평론, 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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