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듯한 괴로움에 흐느껴 우는 사람들이 있다. 절망으로 한숨짓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의 참 가치는 슬퍼하는 자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 그 꺼져 내리는 한 숨과 흐느낌을 껴안고 다독이며 닦아주는 데 있다. 거기서 종교적 영성이 피어난다. 괴로움의 교감과 공감의 영성이 열리지 않는 사회는 캄캄한 어둠이다. 그래서 먼저 아픈 사람들의 흐느낌에 투명한 눈으로 귀 기울일 일이다.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 그들의 괴로운 슬픔을 듣고 그 아픔으로부터 구제해주는 성인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온 생명들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나 내 자신처럼
나는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실체는 없다. 나는 무아다. 이러한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의 불교다움을 보여주는 말이요, 현대철학과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무아와 공, 그 비어 있음과 무규정성(無規定性)은 모든 생명의 자유로움과 창조의 근거이자 이타적 삶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에 기운 욕망은 자아에 집중한다. 사실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자아’야말로 우리 정신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하고 재작성하는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자아는 자기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 몸속에는 온 세상의 생명과 그 생명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그 생명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태어나고 사라지며 변화한다. 저 시간의 처음이 없는 시작부터 마지막이 없는 끝까지, 저 공간의 보이지 않는 티끌로부터 밤하늘의 별들로 총총한 가없는 공간까지 수많은 생명의 물결이 넘실되고 있다. 그것이 화엄의 우주관이다. 화엄세계는 이름 모를 자그마한 들꽃들을 비롯하여 가지가지 꽃으로 장엄된 불국토를 일컫는다. 그렇게 불국토를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은 보현보살의 힘찬 원력의 발걸음이다. 그것을 행원(行願)이
인간의 심층적인 종교적 각성을, 존재와 온 생명의 실상을, 나와 세계의 유기적 관계를 통찰하여 인류에게 벅찬 감동과 고요한 기쁨을 선사한 위대한 성인은 단연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AI와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종교의 영역을 위협하고 침탈하는 탈종교화시대에 주체적 생명력으로 나 자신을 일깨우는 수행과 존재의 깊이 속에서 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불교의 종교성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탁월한 통찰력과 원력 때문이 아니겠는가.먼저 부처님의 탄생게를 보자. 탄생게는 생명에 눈을 뜬 부처님의 발원문이라고 봐도 좋다.“하늘 위, 하늘 아래서 나 우뚝
아름다운 삶과 역사 창조의 동력은 꿈과 희망이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은 공허하며 무기력하다. 인간은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그 이상을 현실 속으로 앞당기며 살아간다. 현실의 절망과 고통, 결핍과 미완의 존재에서 꿈과 희망의 나래를 펴고 보완, 완성, 충족, 행복과 평화의 가치 창조를 향해 날개 짓 한다.꿈과 희망이 종교적 확신과 비원으로 연결된 것이 발원이요 서원이며, 원력이자 행원이다. 그래서 서원은 한순간 식어버리는 뜨거운 열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열정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역사의 강물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