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로 할 때 내놔.”“누가 당신 구슬을 가져갔다고 이러십니까?”“당신 말고 누가 있어. 그럼 딴 사람이 훔쳐갔단 말이야?”장인은 눈알을 부라리고 곧장 대문을 닫아버렸다.“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그래, 꼭꼭 잘 숨겨봐라.”장인은 씩씩거리며 비구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 하지만 비구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속살을 내보이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도 비구는 끝내 옷을 벗지 않았다.“지금 나와 싸워보겠다는 거냐?”“당신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구슬을 훔치지 않았다면 옷을 벗어서 증명해.”“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의지를 다지며 나선 길이라 해도 그 여정에는 예상했던 일보다 예상 밖의 일들이 훨씬 많다. 뜻밖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 고난의 문턱을 쉬엄쉬엄 수월하게 넘어서는 사람은 사실 드물다. 대부분은 자신의 지혜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당황하고 번민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회의와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스스로에게 문득 질문을 던지게 된다.“내가 가려던 곳이 도대체 어디였지?”젊은 시절 너무나 선명했던 삶의 목표가 어느새 이맛살을
부루나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매우 기뻐하셨다.“훌륭하구나, 부루나. 이렇게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고 고요함을 구족하였으니, 그대는 수나파란타 지방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고향 돌아가자마자 살해 위협두려움 없는 당당함에 감복수많은 우바이·우바새 교화청청한 언행이 전법 원동력불법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칼에 찔려 죽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던 부루나 존자의 결의는 만용도, 허언도 아니었다. ‘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부처님의 허락을 얻은 부루나 존자는 그 밤을 기원정사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사위성에서 걸식을 마치고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렸을 때, 선뜻 뜰 안으로 들어오라 권하는 이웃은 열에 하나도 드물다. 그럴 때, 상냥하지 못하다며 이웃을 탓한다면 오만한 태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초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집 대문을 다시 두드릴 수 있다.부루나 존자가 부처님으로부터 간략한 가르침을 듣고 고향으로 떠나는 장면이 상윳따니까야 ‘뿐나경’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뿐나여, 나의 이러한 간략한 교계를 받고 그대는 어느 지방에 머물려 하는가?” “세존이시여, 수나빠란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두 눈을 가로막던 캄캄한 장막이 단박에 걷히는 시원함,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훌쩍 내려놓은 홀가분함, 쇠사슬처럼 옥죄던 고뇌가 탁! 풀어지는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껴보았을 것이다. 깊건 얕건, 오래 지속되건 금방 사라지건, 완전하건 불완전하건, 그것이 열반(涅槃)이다.‘전법의 표상’으로 추앙되지만출신·행적은 전적마다 제각각공통점은 부족해도 전법 매진부처님께서 설법제일로 인가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하고 찬탄했던 것은 경전 속 관용구에
선가(禪家)에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 송곳이란 뜻입니다. 송곳은 아무리 깊이 감추려 해도 뾰족한 끝이 저절로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대학교수들이 간행하는 교수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2014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 누구 하나 반박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각종 권력형 비리와 부정이 만연한 현 사회를 비판하는 말이겠지요. 또한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들 입을 닫아버리는 비정한 침묵을 꼬집는 말일 것입니다. 거짓과 편법의 장막이 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