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운사 도량에는 젊은 활기로 가득 찼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법우들의 여름캠프가 열렸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 Maitreya’라는 주제로 열린 캠프에는 대불련 회원은 물론 역대 동문과 친지들까지 함께 해 그 의미를 더했다. 산중 암자에서의 명상순례, 인근 바닷가에서의 별빛문화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은 그들의 풋풋한 젊음을 발산시키기에 충분했다. 청년 불자로서의 사명감과 그 실천을 모색하고자 열띤 토론을 벌이는 열정에 뭉클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 한켠이 헛헛했다. 쾌활하고 진취적인 그들과의 차담 속에서 그들만의 고민과 갈등이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사회에 나가 꿈과 도전, 그리고 열정으로 타올라야 할 이 시대 청년들 앞에 등록금 천만원 시대, 적자세대, 무한경쟁,
노숙이나 부랑의 역사는 아주 길다. 하지만 어디서든 공동체가 삶의 근간을 이루던 근대 이전에, 부랑이나 노숙은 아주 특별한 사정을 가진 개인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생산이나 생활을 공동체 단위로 했기 때문에, 살 집이나 먹을 것 역시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공동체 전체가 굶는 일은 있어도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굶는 일은 없었다. 일할 능력이 없는 심봉사나, 그런 아비를 둔 심청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웃(공동체!)이 먹여 살렸기 때문이었다. ‘동냥’이란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일할 능력이 없는 개인을 먹여 살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건 지저분한 게 아니라 깨끗한 것이었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런 것이었다. 남방 스님들의 ‘탁발’ 또한 정확히 이에 속한다.
“밤하늘의 별은 저렇게 총총한데 우리나라는 언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까.” 독립운동을 벌일 때 초월 스님1878~1944)의 간절함이 담긴 토로다. 최근 진관사가 연 학술세미나에서 불교의 항일운동 결사체인 ‘일심교’가 조명돼 눈길을 모았다. 초월이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한 일심교 회원이 70~80여명에 이른 사실은 일제 강점기 때 올곧은 불교인들이 적지 않았음을 깨우쳐준다. 기실 광복 66년이 넘어서도록 우리는 친일과 항일조차 온전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항일운동의 묻혔던 진실이 곰비임비 나타나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조직적으로 친일 세력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독립군과 가족들을 마구 학살함으로써 악명과 원성이 자자했던 ‘간도특설대’의 장교 백선엽이 이명박 정권 들어서서 ‘영
올 여름은 우리나라가 바야흐로 아열대 기후권에 들어섰음을 대다수 국민들이 확신하게 된 해로 기억될 것이다. 7월 중순부터 내린 거센 빗줄기는 ‘장마’와 ‘호우(豪雨)’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배신했다. 말 그대로 ‘동이로 붓듯’ 쏟아진 비는 산을 무너뜨리고 도심을 수몰(水沒)시키면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인구 천만이 넘는 세계적 거대도시 서울의 중심이 한 나절의 비로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강남대로가 물에 잠기고 우면산 일대는 산사태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대도시 서울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그 중심과 주변에 수려한 산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가깝게 남산과 인왕산을 비롯하여 북한산·청계산·수락산·도봉산·관악산·우면산은 우리가 언제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휴식처로
가슴 아픈 여름입니다. 예년에 없던 비가 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은 7월 한 달 동안 해 한 번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도 막대합니다. 우면산 산사태로 인한 인명 피해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춘천에 자원봉사활동을 나섰던 젊은 대학생들도 산사태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직 청춘의 꽃도 피우지 못한 생명이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에 대한 진상조사도 중요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마땅히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근본적인 위로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규명과 보상이 고귀한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산사태에 직면한 분도, 피해를 당하지 않은 분들도 한 번쯤 귀 기울여 주었으
근대 이전 시기에 적어도 동양에선 나이가 든다는 것을 성숙과 지혜와 연관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것을 “나이가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나이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을 지나 나이 70쯤 되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서 어긋남에 없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로 이어지는 공자의 유명한 문장은, 먹은 나이가 소화되어 삶의 지혜가 됨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 지혜가 늘어난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지혜가 늘기는커녕 반대로 나이만큼 편협해지고 독선적이 되며 남 얘기는 무시하고 자기 고집만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경우를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려운
홍련암.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홍련암 바닥에 난 구멍으로 푸른 바다의 하얀 파도와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홍련암에 머물며 수행을 하면 곧 해탈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그래서였다. 홍련암은 첫 만남 이후 언제나 내 마음에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첫 장편소설을 쓸 때도 홍련암을 담았고 30대 때도, 40대 때도 가만히 찾아갔다. 2005년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일 때 시시각각 전해오는 급보 속에서도 제발 홍련암만은 무사하기를 얼마나 기원했던가. 그 홍련암을 최근 다시 찾았다. 어느새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홍련암에 머물며 수행하면 해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예감했던 그날의 자신감은 이미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밀려
몇 달 전 외식한답시고 한 식당에 들렀다. 그저 그럴싸한 간판만 보고 들어갔다. 저쪽 방안에서 한참 분위기가 좋았다. 화장실 간답시고 문을 열고나서는 사람은 하나같이 말끔했다. 다들 꽤 고급스런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30대 후반이나 40대가 주였지만 그 흔한 배나온 아저씨 하나 없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궁금했다. 뭐하는 사람들일까. 저리 때깔 좋은 남자들이 떼로 있다니. 우리나라에서 저 나이에 저렇게 당당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대단히 특별한 공무원’에 생각이 미쳤다. 남들도 수재라고 하고 자기도 수재라고 믿는 참 머리 좋은 이들의 집단. 그래 맞다. 검사다. 그리곤 다시 생각했다. 여기가 서초동도 아닌데 전국에 겨우 1800여명 있는 검사가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모여
최근 지하철에서 아연실색할 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할머니가 예쁘다고 아이를 만졌다가 아이 엄마로부터 폭행을 당한 일이 있는가 하면 20대 남자가 80대 할아버지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이래도 되는가 싶지만 그들만의 사건만은 아닌 듯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비수로 꽂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내상을 입은 상대는 그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댓글에 상처 입고 목숨을 끊는 유명인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합니다. 인격은 단순한 성격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성격은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나 품성을 이릅니다. 인격은 좀 더 깊으면서도 포괄적입니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는 항상 선적이고 이타적이기에 향기가 납니다. 말은 참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고위공무원들 모아 놓은 자리에서 “나라가 온통 비리투성이”라고 일갈했다는 얘길 듣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앗, 그걸 어떻게 알았지? 물론 우리야 모두 다 알고 있던 것이기에 이제 와서 새삼 그런 말을 하는 게 정말 웃기는 얘기지만, 그건 그에게만은 철저히 비밀로 부쳐져 있었던 거 아니었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대통령 3년에 세상의 비밀을 보는 안목이 생긴 것일까? 나를 놀라게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용기였다. 대통령 선거 이전부터 누구보다 많은 비리를 짐지고 있던 분 아닌가? 자신의 몸마저 바치려는 살신성인의 용기가 없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칼날을 들어 비리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용기가 놀랍긴 하지만 아직도 그가 안목이라는 면에선 조금 부족
마침내 대학 등록금을 반값으로 내리자는 의제가 공론장에 등장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마저 대학 등록금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나섰다. 기실 ‘반값 등록금’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었다. 2009년 봄, 긴 생머리의 대학총학생회장이 눈물을 참으며 청와대 앞에서 삭발했던 이유도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키라는 요구였다. 그럼에도 다시 정치권과 언론에서 ‘반값 등록금은 포퓰리즘’이라는 부르대기가 퍼져가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물론, 정치권의 변화는 다분히 국회의원들이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포퓰리즘, 곧 인기영합주의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의 의미를 망각한 몰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 자체가 해결해야 할
불교학과를 입학하고 공부를 시작한 이후 불교가 내게 제약이었던 적은 별로 없다. 함부로 막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불편한 적이 한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낚시였다. 고향이 바닷가인지라 낚시는 어릴 적부터 내게 익숙한 놀이였다. 물고기가 미끼를 툭툭 건드릴 때는 더없이 짜릿하다. 대학 1학년 여름 고향에서 낚시를 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갯지렁이 입에 낚시 바늘을 꿸 수가 없었다. 바닷가에서 나는 느꼈다. 이제 영영 낚시는 못하겠구나.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낚시를 한 적이 없다. 여리게나마 자란 불교적 정서가 행동을 제약한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능력의 감퇴가 아니라 능력의 신장이었다. 하지 않음의 능력 말이다. 두 번째는 논산 훈련소에서였다. 입소대로 가는 길에 아직 철
입하가 지났습니다. 계절로는 여름이라 해야 하겠지만 아직도 세상은 완연한 봄인 듯합니다. 만화방창의 꽃들은 지금도 저마다 간직한 향기를 지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봄이라 하든, 여름이라 하든,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입니다. 이 맘 때쯤이면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 사찰의 손길도 제법 바빠집니다. 겨울과 이른 봄에도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은 멈추지 않지만, 그래도 산사를 찾는 발길은 이 때 부터 초가을까지가 제일 붐비기 때문입니다. 산사를 찾는다는 것, 며칠이라도 사찰에서 머무르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단순관광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을 보고, 듣고, 나아가 경험해 보려는 의식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나아가 경험케 해 주어야 할 의
종종 우리는 뜻하지 않은 존재자가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예전에 그것은 네스호의 괴물이나 UFO, 혹은 영매의 몸에 갑자기 내려앉은 귀신처럼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던 것들, 혹은 과학의 시선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것이 별로 남아나지 않게 된 지금, 그런 ‘신비한’ 사실 자체도 별로 남아 있지 않거니와, 어쩌다 귀에 들어온다 해도, 일축의 감탄사와 함께 쉽게 묻혀버리고 만다. 그래도 종종 당혹을 야기하는 뜻밖의 존재자들이 있다. 전에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돌다 모여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쓰레기의 섬 얘기를 인터넷서 보았을 때 그랬다. 이때의 놀라움과 당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던 것이었다는
“아들아 서러워 마라, 새날이 올 때까지 싸우리라.”오월항쟁에 나선 민주시민의 묘비명 가운데 하나다. 1980년 오월 그날로부터 31년이 흘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 적잖은 사람들은 새날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오월의 민주시민들이 꿈꾸던 새날이 과연 부익부빈익빈 세상이었을까. 더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그날의 민주시민들을 다시 학살하는 야만이 벌어지고 있다.자칭 ‘보수단체’인 ‘국가정체성회복 국민협의회’와 ‘한미우호증진협의회’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까지 직접 찾아가 5·18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5월이다. 옅은 초록으로 대지가 수줍다. 길을 걷자니 나도 아이인 양 설렌다. 고개 들면 황사로 대기가 무겁지만 눈높이 세상은 꽃피고 푸르다. 고맙다. 이 계절이 있어 아무튼 고맙다. 길가엔 줄지어 달린 연등이 봄바람을 맞는다. 흔들흔들 하느작하느작. 하기야 시절을 생각하면 적이 처량도 하다만 애써 반갑다. 그래 부처님오신날이다. 크고 작은 절에선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힘들지만 그래도 즐겁다. 절집 구석구석 사람들이 들어차니 시끄러워도 꽤 힘차다. 이 폭풍이 지나면 얼른 쓸쓸해지겠지. 부처님오신날은 마야부인이 아들 고타마 싯다르타를 낳은 날이다. 경전에선 싯다르타는 도솔천에 있다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는 하얀 코끼리를 타고 천신의 호위를 받으며 왔다. 그가 도솔천에 있을 땐 인간이
부처님오신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시라도 중생의 아픔을 잊지 않으신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일심(一心)으로 염송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 게 이 마음이 바로 자비(慈悲)로 가득한 자량(資糧)의 씨앗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나투신 오월, 자연의 푸르름은 ‘희망’과 ‘긍정’을 말하고 있는데 불자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하신지요? 그리 편치만은 않을 듯 합니다. 소납 역시 그러합니다. 장로 정권의 반문화적인, 반생명적인, 반민주적인, 반인권적인 정책과 행동들은 불자들은 물론 국민과 이 땅의 생명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국민을 향해 온갖 정책과 공약을 쏟아내더니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더니 이제는 그런 공약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을 혼란과
한국에서 자살은 이제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고 수준이 된 듯하다. 지난해 서울대생 가운데 5명이 자살했다고 하더니, 올해는 몇 달 안되는 사이에 카이스트 학생 4명, 급기야 교수도 1명 자살을 했다. 잘나가는 엘리트들이 앞장서 자살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드러난 카이스트의 현실은 자살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징벌 등록금, 예외 없는 영어강의, 등록연한 제한, 교수들의 실적주의 등등 단 한순간도 경쟁에서 피할 수 없는 제도로 학생은 물론 교수들을 토끼 몰듯 쪼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끼몰이 제도들이 한때는 총장이름을 따 ‘서남표 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찬양되었다고 한다.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이 많은 이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멀쩡한 소 돼지가 잔계산의 경
초과이익공유제. 한국 사회에서 곰비임비 쟁점으로 불거지고 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삼성그룹 협력사 공정거래 및 동반성장 협약식’에 참석해 초과이익공유제를 계속 추진하겠다며 ‘꺼져가는 불씨’에 호호 바람을 불었기 때문이다. 기실 초과이익공유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양극화가 무장 커져가는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동반성장위원회의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왔다. 두루 알다시피 한국 경제에서 중소기업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전체 기업의 99%에 이른다. 일자리를 보더라도 고용의 88%를 담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대기업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중소기업의 아우성은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언론에 광고를 많이 주는
지난달 모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 때문에 시끄러웠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가수 일곱 명이 나와 각각 노래를 부르고 심사자들이 그들을 평가해 최하위는 탈락시키고, 한 사람을 충원하여 다시 경쟁하는 방식이다. 요즘 좋아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제작진은 바로 이 긴장으로 가수들의 노력을 유도하고 그것이 무대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길 기대했다. 요즘 대중음악을 생각하면 고무적인 시도다. 최근 텔레비전 음악프로그램은 어떤가. 이른바 아이돌 스타가 점령한지 오래다. 짧게 소비되는 가수를 기획사에서 계속 찍어낸다. 민망한 노래실력으로 가수입네 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심지어는 30대가 된 전직 아이돌이 예능프로에 나와 무슨 원로 가수인양 회고담으로 시간을 때운다. 채널은 많지만 채널 선택권을 일찌감치 박탈당했다. 투표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