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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신앙의 고향-파주 쌍미륵

기자명 이학종

“통일 되는 날 쌍미륵에 남겨진 탄흔은 씻은 듯이 사라지리라”

곧잘 ‘통일 한국’의 수도로 일컬어지는 파주 땅을 찾아 떠난다. 때마침 열린 남북정상회담으로 남과 북 모두에 통일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이즈음, 분단의 상징 휴전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파주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이 길은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리라는 믿음을 되다지며 나그네는 비 내리는 통일로를 질주한다.

파주는, 미륵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삼한의 통일을 기도했던 궁예의 도읍지 철원과 마찬가지로 서부전선에 인접해 있다. 예로부터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지정학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곳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척박한 오지였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도로도 끊겨 군사작전도로로만 기능했던 이 고을의 길들이 별안간 넓혀지고 포장이 된 것은 남북간 대화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그 대화가 양측 위정자들의 정략적 필요에 의해서든 아니면 순수한 염원에서 이뤄진 것이든 그로 인해 통일로이니 자유로이니 하는 도로들이 훤히 뚫리면서 파주는 사람들의 발길로 한층 북적됐으니, 통일을 향해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는 고만고만한 정치꾼들의 사소한 수작에 흔들리는 것은 아닌 듯싶다.

수도권의 자족도시로, 미래 통일한국의 거점도시로 각광을 받으면서 아파트촌이 즐비하게 들어서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지만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을수록 이 고을이 차지할 비중은 엄청나게 커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서울에서 박달고개를 넘어 고양리를 지나고 이어 혜음령 고개를 너머 광탄쪽으로 달려가다 보면 용미리가 나온다. 예로부터 미륵뎅이로 불린 이곳은 서울과 개성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구파발이니 벽제역이니 하는 말들은 이 길이 조선과 고려의 도읍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다. 특히 용미리는 예로부터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혔다. 그곳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조성된 것도 이곳이 보기 드문 명당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명당이라고 하면 우선 생각나는 인물이 도선과 무학이다. 파주 땅 역시 도선과 무학의 발길이 스치고 지나간 곳이다. 물맛이 좋다는 이유만으로도 물통을 든 서울과 일산신도시의 시민들이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파주의 고찰 고령산 보광사는 도선이 창건한 절이다. 도선은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국의 태조가 될 것을 예언한 우리풍수의 원조격이고, 무학 역시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 서울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게 한 풍수의 대가가 아닌가.

도선이 창건한 보광사 산내에 미륵도량 도솔암이 고즈넉히 자리하고 있고, 무학이 지나갔다는 용미리는 그가 이곳에서 용의 머리를 보고 현재의 대자리 자리를 용의 몸뚱이로, 혜음령 고개넘어 광탄면으로 와서 용의 꼬리가 아홉 갈래로 갈라졌다고 하여 그곳을 구룡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니 이곳 역시 미륵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고을이다. 비록 용미리 쌍미륵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미륵상이 남아 전해지지 않지만 도선과 궁예와 왕건, 그리고 후대의 무학과 이성계 등 당대의 영웅들이 뻔질나게 오간 고을에서 어찌 새세상 건설을 염원하는 미륵의 비원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보광사에 들러 도솔암 가는 길을 따라 올랐다. 왼쪽의 제법 큰 계곡을 따라 나 있는 산길의 정취는 영락없이 미륵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도솔천 가는 길이다. 때마침 내린 장대비로 우무(雨霧)마저 뿌옇게 그리우니 분위기조차 제법 그럴 듯하다.

파주를 대표하는 미륵은 뭐니뭐니해도 용미리의 쌍미륵이다. 빗길을 헤치고 달려온 나그네를 미륵님이 환영하는 것인가, 양동이로 부어대듯 무섭게 내리던 빗줄기가 일순 잦아든다. 3년 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잇따라 발생한 사찰방화사건으로 이곳 용암사의 법당은 타다 남은 그을린 목재만 한켠에 남겨놓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왼쪽 108계단 위에 버티고 선 쌍미륵의 위용은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의 당당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가까이 있어 외려 친견의 기회가 없었던 미륵님을 찬찬히 살펴봤다. 불상 여기저기에 총알을 맞은 흔적이 선연히 남아 있어 동족간에 벌였던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할 민초들이 영문도 모를 전쟁에 동원돼 죽이고 죽는 광경을 이 미륵님은 똑똑히 지켜보았으리라. 그날의 상흔이 남아 있음인가. 두 미륵의 시선은 휴전선으로 가는 길을 망연자실한 눈망울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같다. 아마도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동포가 얼싸안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날 미륵님의 가슴에 저리게 남아 있을 상흔들은 씻은 듯 사라질 것이리라.

용미리 미륵불에는 고려 선종의 후처인 인주 이씨(원신공주)의 연기설화가 전해진다. 선종이 후사로 맞아들인 이씨에게 아기가 들어서지 않자 노심초사했고, 그러던 중 이씨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났으며, 이씨는 두 도승의 얼굴을 용미리 쌍미륵에서 찾아내어 이곳에 절을 짓고 그들의 얼굴을 새겨서 기도해 마침내 왕자를 낳았다는 것인데 그 설화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이 미륵님들은 파주와 벽제 지역 기자신앙(득남을 바라는 민간신앙)의 명소가 되어 민초들의 애환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경기도 북부지역에 이처럼 거대한 미륵이 조성된 것은 드문 일이지만 기존의 바위에 두상과 보관을 따로 조각해 올려놓은 형식으로 보아 거석을 숭배하는 민초들의 원초적 심성을 신심장한 당대의 실력자가 미륵신앙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한 것이라는 학계 일각의 추측이 설득력을 갖는다.

고려의 도읍인 개성과 조선의 도읍인 한양의 사이에 위치한 파주지역은 역사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 늘 혼란과 혁명의 진원지에 인접해 있었다.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인물들이 수도 없이 오갔을 이 곳에 거대한 미륵님이 조성된 것은 따라서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후궁인 인주 이씨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말하길 “우리는 파주군 장지산에 산다. 식량이 떨어져 어려우니 그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라. 그러면 소원을 이루리라.”고 했다.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니 마침 그곳에 두 거암이 나란히 서 있어 불사를 벌였다. 공사도중 두 도승이 공사장에 나타나 이르길 “좌측에는 미륵불, 우측에는 미륵보살을 조성하라”고 말하고 표연히 사라졌다.

이 전설은 아마도 당시 가난으로 굶주리는 민초들에게 먹을 것을 내리면 곧 미륵이 주재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이 지역 주변에 폭넓게 형성됐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가 건립될 때마다 때론 거암으로 또 때론 미륵이 되어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켜보았을 용미리의 미륵, 필시 이 미륵님들은 통일한국 완성의 위대한 역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리라. 통일이 되는 그날, 이 길목을 천년을 넘게 지켜온 쌍미륵님은 환한 미소를 지긋이 머금으실 테고.


글 이학종·사진 황도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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