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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50년 불교50년-①불교문학

기자명 고재석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1. 서론

한국 현대 문학사, 특히 해방 50년 이후의 현대문학사에서 불교는 과연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흔히 말하는 불교문학은 과연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있다면 그 정의는 무엇이며, 또 누구의 어떤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불투명하다.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돌아온 사람이 그 느낌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막상 의자에 앉았지만, 도무지 붓이 나가지 않아 숱한 파지만 내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는 그암담하고 까무룩한 심정과도 같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해방 이전의 문학사하면 그나마 한용운, 박한영, 양건식, 김달진, 조지훈, 서정주 등 언뜻 연상되는 인물이라도 있어 말끝을 흐려가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해방 후의 경우는 눅눅하게 들러붙은 고서처럼 좀처럼 생각이 펼쳐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문학의 범주에 걸맞은 작가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기쁜것도 한 순간, 마음 한 쪽 구석에서 문학이면 문학이지 왜 불교문학인가, 그것은 일종의 소재주의나 호교 문학에 대한 강변 또는 옹호가 아니냐는 질책이 손톱을 세우고 일어나 마구 달려든다. 더구나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오늘의 문민정부 시대로 이어지는 그 소용돌이의 반 세기 동안 과연 불교는 우리들에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움츠러든 어깨를 자꾸 짓누르는 것이다. 뿐인가. 둘러보면 주변에는 책도 많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나 정연한 논지를 담은 책은 많지 않으니 가슴은 날로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귀찮은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두꺼운 유리속을 걷는 심정이 있다면 정녕 이런 것일까.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현대사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시를 읽지 않는 독자들의 상습적인 불평은 아닐까? 구태의연하게 고색창연한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은 이 세상의 가치있는 모든 것이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불교문학이라는 문제를 놓고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 역시 이런 상습적인 불평분자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훌륭하다는 말을 듣자면 자신은 한없는 괴로움을 받아야지'라는 황매천의 시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시 우리는 불교와 문학 그리고 불교문학이란 명제를 차근차근 생각하기보다는 우선 대상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갖추고 싶어 초조한 나머지-가령 한용운의 문학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불교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애를 태우는 사람들의 순수한 또는 어리석은 강박관념과 자학처럼-미리 실망하고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도 이해하기 어려운 터에 불교라니 가당치도 않다면서, 그러나 이런 태도는 풍문이나 타자의 암시에 눌리어 불교를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 당하기를 원하는 신자이며 작품을 읽기보다는 읽히기를 바라는 독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어렵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고, 즐겁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행복한 체험으로 바뀐다. 또 세상의 어떤 작가도 문학이 무엇인가를 다 알고 난 다음에 작품을 쓰지 않는다. 스님들역시 불교가 무엇인지를 다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즐겁고 기쁘며 또한 넉넉한가. 그렇다.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순간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진리는 저기에 있다. 아무도 데려다 주지 않는다. 우리가 가는 것일 뿐.

어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고 난 다음에 논의를 전개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어찌 어리석은 욕심이겠는가. 하지만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은 법. 우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일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키는 대로 읽지 말고, 되는 대로 생각하지 말 것이다. 멀리 가고 혼자 가고 그윽한 곳에 숨어 형체가 없는 마음을 제어하여 도를 따르면 악마의 속박은 스스로 풀린다고 했으니…. 우리는 어렵다고 해서 불교문학이라는 명제를 살그머니 피해 달아날 궁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호랑이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잡을 수 있다. 불교문학 역시 예외는 아닐터. 다만 서투름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의 없음은 용서받은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바싹 다가설 때 불교문학은 자신을 둘러싼 짙은 안개를 조금씩 걷어줄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교가 소외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불교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이 글의 전제이자 출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불교과 관련을 보여주는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특히, 고전문학에는 어떤 의미에서 불교의 투영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으며, 그 연구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해방 50년 이후의 현대문학을 향해 한번 눈길을 돌려보면 사정은 상당히 달리진다. 문학작품의 내용이나 경향도 이질적이지만 불교의 투영이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하고 퇴색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문학과 불교의 관계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은 그 지적인 호기심의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성과를 별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교와 문학 사이에는 상당한 단절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단절은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났을까? 과연 일부 평론가들이 지적하듯이 현대문학에는 빼어난 불교문학 따위는 없으며, 김성동이나 일부승려 작가들이 쓴 몇 편을 제외하고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거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내리막길로 해서 불교는 문학사에서 그 역할을 다한 것일까? 더구나 제4세대들이 글쓰기를 주도하고 있는 후기 산업시대에 불교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겠느냐는 지적도 그럴듯 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우리 문학의 주체성의 확립, 전통의 발전적 계승, 서구 문학의 비판적 섭취라는 과제를 떠올릴 때마다 불교문학을 남의 손에 넘어간 선대의 땅처럼 애를 쓰며 찾아보려는 것일까?

이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때 사람들은 분명 이런 부정적 통념에 대해상당히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마땅한 답변을 마련할 수 없어 암중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학연구자들에게 불교문학이란 그냥 지나치기에는 허전하고 돌아서면 무엇인가 아쉬운, 그런 화두의 하나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화두는 불교 나아가 종교와 문학의 이율배반적 성격과 현대문학과의 원리적 모순 및 시대적 특성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욱 어둠 속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해결할 방법은 없는가? 아니다.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 방안의 하나는 먼저 불교문학을 감정적으로 고집하기 전에 이런 부정적 견해의 근거를 냉정히 검토해 보고 그 불합리한 점이나 결핍된 부분들을밝혀보는 것이다. 한 빛은 한 빛 바깥에서 더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한 빛 바깥에서 한 빛을 보고, 다시 그 한빛으로 한 빛바깥을 보는 과정을 통해서 해방 50년 이후의 한국문학사에서 그늘에 가려졌던 불교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조금씩 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한국현대문학사에서의 불교의 소외와 그 원인

우리는 앞에서 현대문학사에서 불교의 소외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불교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더욱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을 이 글의 전제이자 출발점으로 표나게 내세운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기에는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 망설임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그 중의 하나는 종교 특히 불교와 문학의 이율배반이라는 영원한 숙명적인 관계일 터인데, 이를 먼저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불교문학은 언제나 현대문학사의 한 그늘진 구석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으면 안될 듯 하다.

2-1. 문학과 불교의 이율배반적 성격

신앙이라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입장에서 문학을 바라 본다면, 문학은 불교와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인 동시에 하나의 범죄라는 생각마저 통용되는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종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문학을 버리던가 그렇지 않던가 하는 양갈래의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불교도 문학과 인간상의 추구라고 하는 점에서는 동일한 명제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나 정념, 욕망 등에서 비롯되고 있는 행동의 세계를 묻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대처하는가 하는 인간상의 추구 방법에 따라 문학과 불교는 명확하게 그 방향을 달리하는 것은 아닐까?

문학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인간이 되려고 하는 지향 위에서 성립하는 것임에 반해 불교는 자연관으로서의 인간성을 부정 또는 초극하려는 방향에서 인간상을 추구한다. 만일 있는 그대로의 인간성의 심오함을 탐구하고 그 진실을 추구하여 형상화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문학에서 인간적 진실을 되돌아보고 그와 같은 인간적 진실을 미망으로 물리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오류가 없는 인간 존재를 관찰하고 모든 인간적 고뇌의 근원인 무명을 밑바닥에서부터 근전할 수 있는 궁극적인 지혜를 획득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리석은 인간을 어리석음 그대로 묘사하려고 하는것이 문학이라면, 불교는 역으로 그 어리석은 눈을 개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문학이 애욕.명리.진에 등 이른바 번뇌의 세계에 빠져 꿈틀대고 있는 인간의 양상을 그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 인간성에 밀착하고 그것을 긍적적으루 묘사하고 있는 한, 불교적 지향에서는 결국 피안적인 미망에 집착하고 애착하며 참잠하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인 '광언기어'와 같은 것으로 물리쳐야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문학과 불교의 이율배반이라는 영원한 숙명적 관계가 가로 놓이는 것이다.


고재석 /동국대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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