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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과 선학원, 왜 한뿌리인가] 1. 선학원 설립배경과 의미

  • 특별기획
  • 입력 2019.12.16 14:04
  • 수정 2019.12.16 14:06
  • 호수 1517
  • 댓글 4

1934년 수좌 외호 위해 재단법인 전환…수덕사·범어사 등 재정 기탁

1921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흔들리는 불교전통 잇는 원력 
만공스님 주도 건립자금 모연
수좌 보호 위해 재단법인 설립
수덕사·범어사·직지사 등 주축
현재의 선학원, 역사 돌아봐야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전환한 선학원은 한국불교 청정승풍을 진작하고 전통계맥을 정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941년 봉행한 ‘유교법회’(왼쪽)도 그 일환이었다. 만공, 한영, 상월, 서옹, 적음, 묵담, 동산, 운허, 청담, 석주, 고암, 자운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은 선학원 중앙선원의 옛 모습.

재단법인 선학원의 정체성 문제는 조계종, 나아가 한국불교계의 오랜 고민이다. 왜색불교에 맞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청정불교, 선풍진작을 이끌었던 선학원이 이제는 그 설립 정신과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재단법인이라는 특성을 악용한 폐쇄적인 운영 방식과 전횡, 여직원 성추행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법진 이사장과 이를 비호하는 이사회에 대한 비판여론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본 기획은 역사의 흐름 속 선학원의 설립정신을 조명하고 설립 후의 변화를 확인함으로써 현재 선학원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정체성’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편집자

1921년 5월15일, 서울 안국동의 석왕사 간동포교당. 보살계 계단이 마련된 가운데 사부대중이 운집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함 속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켜나가고자 뜻을 모은 이들이었다. 성월 스님(범어사)과 용성 스님(범어사·해인사), 남전 스님(범어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수좌들이 자리한 가운데, 만공 스님(수덕사)이 법좌에 올랐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조선불교는 완전히 식민지 총독 관할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총독의 허가 없이는 사찰의 이전·폐합으로부터 절간에 있는 온갖 재산, 기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파국이기에 조선중들이 자꾸만 일본중처럼 변질이 돼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실로 불조정맥을 계승해 보려는 납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에 사찰령과는 관계가 없는, 순전히 조선 사람끼리만 운영을 하는 선방을 하나 따로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회의를 통해 그 생각을 모아봅시다.”

선학원을 태동케 한 역사적인 일갈이다. 이날 법석은 선학원 출범의 신호탄으로 기록된다. 통칭 ‘선학원 건립 자금을 모으기 위한 보살계 계단’으로, 스님의 발언에 선학원의 설립취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1921년은 일제 치하에서 ‘사찰령’이 공포된 지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사찰령은 당시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와 합병시키고자 했던 ‘원종·조동종맹약’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시발(始發)에 다름 없었다. 

만공 스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시 한국불교는 총독과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수행과 포교는 물론, 종교의식조차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사찰령의 속박에 묶였다. 사찰령은 사찰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재산권을 침해했으며, 한국불교는 점차 정체성과 독자성을 잃어갔다. ‘산중공의(山中公儀)’를 통한 ‘원융산림(圓融山林)’의 전통은 희미해졌으며, 주지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경제적으로 타락하거나 일본불교의 ‘대처식육(帶妻食肉)’ 문화에 젖어 든 스님들이 대거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동한 ‘선학원’의 창건정신은 당연히 일제하 사찰령에 대한 저항 정신과 한국불교 전통수호, 일본불교 유입에 대한 반발, 한국불교 전통의 선수행 정신 회복 등에 기반하고 있었다.

선학원 건립기금 모연에 동참한 이들은 성월, 남전, 도봉, 석두 스님을 비롯한 수좌들과 재가신도들이었으며 당시 돈으로 2만7000원 가량이었다. 특히 성월 스님은 인사동에 위치한 범어사 포교당을 처분해 건립자금으로 투입했으며, 해체한 자재 등이 선학원 건립에 사용됐다. 선학원은 1921년 8월10일 공사를 시작해 11월30일 준공됐다. 

이듬해 선학원 창립 정신에 뜻을 모은 전국 수좌들은 ‘선우공제회’를 출범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당시 선우공제회 취지서에는 선풍진작과 수행을 위해 자립자애(自立自愛)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중생구제의 원력이 담겼다. 창립총회에 참석한 수좌는 만공, 성월, 학명, 설운, 석두, 고봉, 남전 스님 등 35명이었다. 선학원에 본부를 두고 지부의 형태로 전국 19곳의 선방을 운영했고 운영비는 360여명의 회원이 내는 회비 등으로 충당했다. 

야심차게 출범했으나 미약한 재정은 선우공제회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결국 1924년경 선우공제회 본부는 직지사 사무소로 이전했으며, 선학원도 1926년 5월경 범어사 경성포교소로 명칭과 기능이 전환됐다. 침체기를 맞은 선학원은 1931년 재건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바로 범어사 상호 스님의 주선으로 적음 스님이 이를 인수하면서다. 적음 스님은 직지사 문중이었으나 1930년 만공 스님에게 건당했으며, 탄탄한 재력으로 선학원의 재건을 이끌었다. 이후 선학원은 전국 수좌스님들의 본부역할을 했으며 만공, 탄옹, 남전, 용운, 용성 스님 등을 중심으로 참선지도, 강연, 기관지 발간 등을 통해 활성화 계기를 맞았다. 범어사가 매년 200원을 지원하면서 재정적 여건도 다소 나아졌다. 그러나 스님들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재정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1933년 3월20일 선학원에서 전조선수좌대회를 열고 기존 선우공제회를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개칭, 재단법인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은 선우공제회 및 기타 승려와 신도들이 토지와 돈과 수좌들이 먹고 입고 공부하는 참선방을 만드는 목적으로 토지와 현금을 기부한 것을 모아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낼 것입니다.(…)기부된 토지는 완전하고 영원히 수좌보호에 쓰게 될 것입니다.”(‘불교시보’ 1호, 우리 각 기관의 활동상황 중)

이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이 수좌들의 수행환경 보호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현재 선학원이 선풍진작을 이끌기보다 재단법인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분원관리 등 재산 관리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전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당시 선리참구원 출범에는 현재 조계종 주요 사찰의 선원들이 상당수 기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수덕사(정혜사), 직지사, 범어사 등이 대표적이다. ‘재산 기부자 일람표’에 따르면 선리참구원이 1934년 12월 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허가를 받은 당시 재산 총액은 약 9만원과 정조 600여석이었다. 이중 정혜사 선원이 170석, 직지사 선원이 30석, 범어사 선원이 200석, 대승사 선원이 100석, 선학원이 130석을 기부했다고 기록돼 있다. 

선리참구원을 이끈 스님들은 재단법인 전환을 계기로 선풍진작을 도모하고 전국 수좌 및 선방의 조직기틀을 다지기 위해 ‘조선불교선종’을 만들고 종헌을 확정했다. 김광식 동국대 교수는 ‘선학원의 설립과 전개’ 논문에서 조선불교선종의 의미에 주목했다. 김 교수는 “선서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한국불교가 막행막식과 파계잡행이 횡행하는 등 청정한 불교전통이 무너져 사찰 정재가 환속 승려들의 생활비로 소비되면서 급기야 수도기관(선방)이 폐지되는 지경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며 “이에 선리참구원으로 전환한 수좌스님들이 선학원을 토대로 한국불교 전통을 사수하고 부패의 정화를 이끈다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선리참구원은 ‘조선불교선종’의 근거지로 한국불교 청정승풍을 진작하고 전통계맥을 정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는데, 1941년 봉행한 ‘유교법회’도 그 일환이었다. 유교법회에 이어 만공 스님을 수장으로 한 범행단이 출범했는데, 이는 청정한 계행을 지키는 승려를 외호하는 조직이었다. 

그 즈음, 한국불교에 또다른 움직임이 일었다. 바로 총본산건설운동의 일환으로 등장한 ‘조선불교조계종’이다. 당시 총독부는 기존 조선불교선교양종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국불교의 청원을 수용해 종명을 전환했고 이 과정에서 총본산 태고사(현 조계사)가 한국불교를 총괄하는 사찰로 나섰다. 조선불교조계종은 일제의 지원에 의해 구성됐다는 한계가 있지만 당시 이어져 온 한국불교 종단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대목에서 선학원과 조계종이 한 뿌리임을 드러내는 근거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선리참구원에 터를 둔 조선불교선종의 수석종정은 만공 스님, 종정은 수월, 혜월, 한암 스님이었으며, 1941년 등장한 조선불교조계종은 한암 스님을 종정으로, 종무고문은 경산, 만암, 만공 스님 등 선학원 계열의 수좌 스님들로 구성됐다. 또 조선불교선종 종헌에 ‘신라 도의국사가 창건한 가지산문에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선으로 선종이라 칭한다’고 명시된 부분 역시 조계종 종지와 맥을 함께한다.

특히 이 부분은 현재의 재단법인 선학원이 2016년 8월 100주년을 기념한 ‘상량문’ 등에서 “선학원이 1962년 조계종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 오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광식 교수는 2018년 ‘선학원 미래를 열다’ 세미나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은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을 계승한 종단이며 조선불교조계종은 그 이전의 불교 종단을 계승하고 있다”며 “선학원이 창건되던 1921년, 선리참구원이 법인으로 등장한 1934년에도 사찰과 불교종단은 있었으며 현재의 조계종은 이를 계승한 것이기에 선학원이 조계종을 탄생시켰다고 보는 것은 역사인식의 오류”라고 평가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기점으로 선학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왜색불교 청산을 목적으로 한 혁신운동을 본격화한 것이다. 12월3일 한국불교 각 단체와 연대해 불교혁신총연맹을 출범했는데, 통도사 수좌이자 선리참구원 이사장을 역임한 경봉 스님이 의장으로 추대됐다. 

1953년 6월 불교정화운동이 발기한 곳 역시 선학원이었으며 1955년 전국승려대회 이후 지속된 비구·대처간 갈등 상황 속에서도 선학원은 용성 스님의 대각사와 함께 비구측이 대책을 논의하는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의 산실’로 역할했다. 이 과정에서 동산, 효봉, 적음, 금오, 청담 스님 등 조계종 역대 종정과 총무원장을 역임한 당대의 고승들이 안국동 선학원에 주석했다. 

이처럼 선학원은 암울했던 시기 격동의 근대불교에서 왜색불교에 맞서 한국의 전통불교를 지켰으며 불교정화운동의 산실이자 선풍진작의 외호처였다. 그러나 그 고고했던 역사의 기록에서 현재의 선학원 모습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전국 수좌스님들을 외호하고 안정적인 수행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법인’이 이제는 “그 본래 목적을 저버리고 오로지 분원관리 등 재산 관리와 증식에만 몰두해 있으며 성범죄자 이사장을 비호하는 이사회 전횡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조계종과 선학원이 가진 역사적 동질성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한국불교의 역사라는 점이다. 선학원을 태동시킨 주역들은 현재 조계종의 주요사찰을 이끌었던 수좌들이었으며, 재단법인 출범에 투입된 재산의 상당수가 수덕사, 범어사, 직지사 등 현재 조계종을 대표하는 사찰과 선원의 자산이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과 선지식을 중심으로 모인   불교계의 원력이야말로 선학원을 태동하고 탄생시킨 동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역사 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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