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판철학
3. 비판철학
  • 홍창성 교수
  • 승인 2020.01.28 15:21
  • 호수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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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지식의 한계에 깊은 비판적 통찰 제시”

의심의 눈길을 끊임없이 견지하는 태도가 철학하는 바른 자세
칸트는 세계가 아닌 세계를 연구하는 인식구조 향해 비판 화살
언어·문자 한계 꿰뚫어본 선은 가장 근본적인 지혜의 가르침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한국과 영어권 사회에서는 경험을 통해 이루어 내면화된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지혜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좀 더 전문적이고 철학적으로 중요한 지혜의 이해방식이 있다. 플라톤의 대화록은 철학의 시조라는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믿음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지며 그런 상식을 의심케 하는 비판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철학에서는 어떤 주장이나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참이고 옳다는 근거를 체계적으로 따져가며 가려야 하는데, 이렇게 의심의 눈초리를 견지하는 태도가 철학하는 바른 자세이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작업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겠다.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세 인물로는 고대 희랍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18세기 독일의 칸트가 꼽힌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을 비롯해 3대 비판서를 내면서 ‘비판철학’을 선보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비판’이란 무엇인가? 일상어로서의 ‘비판’은 보통 어떤 주장의 잘못을 드러내는 작업을 가리키는데, 분노지수가 높은 사회에서는 비판과 비난이 잘 구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러나 원래 ‘비판’이란 주어진 주장이나 지식이 진리라는 근거에 대한 탐구 작업을 가리킨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당시 절대불변의 최고 학문으로 받아들여지던 순수수학과 뉴턴의 역학이 진리의 체계라는 근거를 보여주고자 했다. 수학과 물리학이 틀리다고 비난하려던 것이 아니라, 이 두 학문이 최고의 학문성을 가진 불변의 진리라는 점을 밝히는 ‘비판 작업’을 철학연구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수(數)와 기하학, 그리고 자연세계의 물리 법칙 자체를 연구함으로써 그들의 진리성을 밝히려 하지 않고, 수학과 물리학을 만들어 낸 우리 인식구조의 특성과 한계를 밝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말하자면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세계를 연구하는 우리의 인식구조를 향해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

인식의 구조적 특성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철학사에는 정신의 구조를 연구한다면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정신에 대해 혼란스런 저술을 남긴 철학자들이 있는데, 칸트의 작업은 이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었다. 그는 불필요하게 신비감을 주는 정신 자체보다는 인식능력의 결과물로 나온 우리 언어체계의 속성을 연구함으로써 이런 체계를 만들어낸 인식구조를 소급해서 재구성하는 방법을 택했다. 비유를 통해 이 방법을 소개한다.

미국은 성문법 체계를 받아들여 법을 만들어 사법 체계를 운영한다. 그런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창궐해 영화처럼 인류가 사라진다고 가정하자. 미국의 헌법과 법률을 기록한 자료도 모두 소실된다. 그러나 판례를 기록한 자료는 무사히 남는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은 이 판례들을 읽고 연구해 그런 판례들이 나오게 된 미국의 헌법과 법률을 재구성한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장과 언어체계를 연구함으로써 그런 언어를 만들어낸 우리 인식능력과 그 구조를 재구성해 낼 수 있다. 이것이 칸트가 선택한 비판적 연구 방법이다.

칸트는 사유의 구조를 구성하는 12개 범주를 제시하는데, ‘모든(all)’ ‘몇몇(some)’ ‘단일한(one)’ ‘필연’ 그리고 ‘우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언제 ‘모든’이라는 것을 본 적 있는가? ‘몇몇’ 그 자체를 관찰할 수 있나? ‘필연’을 보거나 듣거나 만진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다. 이것들은 우리 인식구조에 내재된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서 경험 내용을 질서지어주어 지식으로 만드는 도구들이다. 칸트는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사유의 범주를 통해 자연세계를 연구한 결과가 뉴턴의 물리학이라면서 물리학의 진리성을 우리 인식구조의 특성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정립한다.

수학에 대해서는 20세기 초반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이 더 재미있다. 자연과학은 수학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수학은 철학의 일부인 논리학으로 대부분 환원된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러셀은 논리학이 수학의 기반이라면서 “수학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사람”이라며 농담하기도 했다. “만약 (a=b)이고 (b=c)이면, (a=c)이다”는 등식을 보자. 수학자들은 그들이 쓰는 ‘만약… 그러면… (if… then…)’ ‘그리고 (and)’ ‘또는 (or)’ ‘아니다 (not)’의 의미를 알고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if… then…’ ‘and’ ‘or’ ‘not’에 대한 엄밀한 정의(定義)는 논리학이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연세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사고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체계의 일부이다.

칸트도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부정(否定)의 범주를 우리 인식구조가 가진 도구의 하나로 제시했다. 이들의 견해와 불교의 ‘열반’ 및 ‘공(空)’ 개념이 보여주는 유사함이 흥미롭다. ‘열반’이란 ‘타오르던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라는 부정적(否定的)인 개념이고, ‘공’도 ‘자성(自性)이 없는’이라는 부정적 의미다. 열반과 공은, nothing이나 nobody처럼,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부정적 표현들일 뿐이다. 이런 논리적 이치를 오해하고 열반과 공을 어떤 굉장한 실재(實在)로 여기며 그것을 얻고자 아까운 수행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토대인 수학의 근거도 비판하는 작업이다. 끝없이 의심하고 따진다. 불교가 지혜의 가르침인 이유는 이런 비판정신과 관련하여 다시금 드러난다. 수학적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은 기본적으로 언어와 문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언어와 문자 자체가 가진 한계를 뚫어 보면서 진리에 대해 불립문자를 표방해 온 선(禪)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지식의 근거를 파헤치려면 결국 언어의 한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 한계를 엄격히 경계하는 전통을 이어 온 불교가 지식의 한계에 대한 가장 깊은 비판적 통찰을, 즉 지혜를 전해 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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