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해 동안 격주로 연재해 온 ‘철학하는 삶’의 마지막 글을 올린다. 내가 24년째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조교수나 부교수는 물론 정교수도 자신의 강의 및 연구 실적 등을 2년마다 약식 보고서로 그리고 4년마다는 A4 용지로 수백 내지 수천 쪽에 달하는 정식 보고서로 제출한다. 제출된 보고서는 학과의 모든 교수가 읽고 함께 토론하고 심사하며, 학장과의 면담과 심사가 뒤따른다. 이렇게 24년을 지내다보니 습관이 들어 이번 법보신문 연재도 뒤돌아보며 보고서를 작성해 보게 되었다.이 연재는 불교계에 서양철학의 통찰과 방법론을 소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문에서 돈오(頓悟)를 개념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여길 것은 쉽사리 예상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 부탁드린다. 특히 ‘불립문자’라는 멋진 표현과 ‘돈오’라는 근사한 단어를 사용하며 스스로의 입장을 펴나가면서 다른 주장에는 “입 다물어라!”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기에 그렇다. 게다가 불립문자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역설(逆說)에 빠진다.(1)불립문자가 진리이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문자로 표현했으므로, 진리가 아니다.(2)불립문자가 진리가 아니라면, 문자로 표현할 수
수행을 통해 불성을 깨쳐 성불한다. 불성은 모든 유정물이, 또 나아가 모든 무정물이 가지고 있다는 신비한 속성이다. 불성은 연기(緣起)하여 무상한 삼라만상 가운데서 변치 않고 모든 사물에 두루 존재한다. 대승 일부에서 사물의 존재양상인 공(空)함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통해 불변인 진공(眞空)의 묘유(妙有)를 주장했듯이, 불성 또한 불변하는 실재(實在)로 여겨졌다.빛으로 충만하고 무한한 지혜의 근원이면서 깨달음을 성취시킨다는 불변불멸의 불성이 힌두교와 그 전신인 바라문교의 아뜨만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불성과
숨 쉬는 모든 순간을 깨달음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그 존재이유를 찾는 이가 불자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의 깨달음을 위해 매순간 혼신의 힘을 불태우는 삶이 그가 정진하는 삶이다. 불자라면 불도의 완성을 서원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두기 어렵다. 그리고 그 서원은 근본적으로 모든 이의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존재세계 전체가 불자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정토(淨土) 세계다. 그곳에는 사방을 둘러보고 위아래를 살펴보아도 모든 사물이 열반을 성취하는 데 쉽게 쓰이도록 이루어져 있다. 정진하는 불자에게 좋은
사람에 대해 ‘부정적(否定的)’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살지 않으면서 일이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비판적’이라는 말과 다르다. 어떤 사안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져본다는 뜻에 가깝다. 요즘같이 만사를 긍정적으로만 보다가는 바보 되기 쉬운 세상에서 더욱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부정(negation)’ 또는 ‘부정적(negative)’이라는 말은 자비심이 깃든 언어를 써야 할 불자가 사람에 대해 적용하기를 원치 않을 표현이다.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은 매일 경전을 읽고 쓰고 논의하며 참선 수행에 정진한다. 이들이 이토록 애쓰는 이유는 이번 삶이 다하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 해탈과 열반에 이르고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탈이란 나고 죽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남이고, 열반은 번뇌의 불길이 꺼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니까, 불자들이 지향하는 해탈과 열반은 모두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이와 같이 수행의 목적이 자유인 불자의 인생관은 환희가 충만한 상태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서구인과는 많이 다르다. 서구인에게는 영혼이 있어야 하고, 그 영혼이
수천 년 동안 고유한 문화를 간직해 온 우리 불가(佛家)에는 멋들어진 말들이 많다. 도량, 시방, 할방처럼 같은 한자어도 달리 발음하여 흥취를 더하지만, 표현 자체가 처음부터 색다른 것도 있다. 그 가운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깊은 철학적 지혜를 담고 있는 것들도 많다. ‘인연이 모여 이 일이 성사되었습니다’나 ‘인연이 다했습니다’와 같은 표현에는 현대서양 분석철학의 논의를 이미 담아두고 있는 듯한 지혜가 묻어난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 절집의 일상 표현 가운데 하나가 철학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려 한다.우리 일상의 말인
사람은 끊임없이 행동한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잠들어 있더라도 심장이 박동하고 호흡이 지속되는 등 많은 생리적 현상이 진행된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움직임도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동(behavior)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한 행동을 넘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행위한다. 의도나 목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동이 행위(action)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행위는 생명체의 행동범위 너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만약 의도나 목적이 뇌세포의 물리화학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이라면,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행동과는
우리는 궁극의 진리를 언어나 논리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선문(禪門)의 주장에 익숙하다. 진리와 깨달음이 문자로는 불가능하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통찰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립문자가 논리에 어긋나는 견해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진리가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논리에 어긋나는 주장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논리는 진리의 충분조건은 못되지만 진리를 구성하는 필요조건이다.나는 사고(思考)를 배제하며 수행자의 체험만을 요구하는 선문 일부의 주장에 철학적 문제가
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다녔다. 근 20년 동안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의타의로 일요일도 없이 휴가도 반납하며 일하고 또 일했다. 나도 한국인이 가장 부지런하다고 믿었다. 유학길에 올라 가끔 접촉한 대학 밖, 보통 미국인과의 경험은 이 믿음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교직을 얻어 미네소타로 이사 온 다음 아내가 쌍둥이를 출산하면서 미국인들과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내 믿음을 바꾸었다. 우리 한국인은 생각만큼 부지런하지 않았다
서양신학은 세계의 생성과 만물의 존재에 대해 여러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제시해왔다. 신이 무(無)로부터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 그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다음에 그냥 두면 어떻게 될까를 질문했다. 사물이 창조된 순간을 넘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창조된 사물이 다음 순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사물은 순간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일상의 경험과 맞지 않다.그래서 서양인들은 신이 사물 안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힘(concurrence)을 불어넣기 때문에 만물이 계속
사유(思惟)란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다. 뚜렷한 답변 없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문제로, 여러 날을 곰곰이 곱씹게 할 만한 주제다. 그런데 현대분석철학은 이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 이유를 문제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질문이 너무 두루뭉술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사유의 본질을 캐려면 뜬구름 잡는 느낌이 드는 사유 또는 사고(思考)를 논하기보다는 그런 사유와 사고를 가능케 하는 개념 체계를 연구해야 길이
우리는 ‘전체(whole)는 부분의 합 이상’이고 ‘세계 또한 구성요소의 합 이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못 드는 물건도 여럿이 모이면 들 수 있고, 생명 없는 분자들이 많이 모이면 생명체가 탄생한다. 들을 때마다 신기하고 근사하다. 그런데 진리는 이처럼 멋지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따뜻하지 않으며 때론 냉담하다. 불교의 가르침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이 아니라고 할 뿐만 아니라 전체의 실재(實在) 자체를 부정한다.현재 한국 불교계 일각에서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의 속성을 창출한다는 창발론(創發
“독자에게 묻습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어리둥절한 질문이다.‘당신 글을 읽고 있다’ ‘과학이론과 사사무애라는 소제목을 보고 있다’ ‘허재경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등….“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단순한 질문 하나에도 관찰자가 보는 시선과 처한 환경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철학, 특히 과학철학에서 이미 폐기된 지 오래됐다. 어떠한 사물도 배경이론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우선 사물을
문법에서 명사화(名詞化, nominaliza tion)란 형용사나 동사를 명사의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명사화된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달리기’라는 명사는 ‘달리다’라는 동사로부터 생겨났고, ‘빨강’은 ‘빨갛다’라는 형용사로부터 나왔다. ‘앉기’ ‘숨쉬기’ ‘멈춤’ 그리고 ‘깨달음’ 같은 명사도 모두 동사로부터 시작됐다.이렇게 형용사나 부사 또는 동사가 명사화하면서 마치 그런 명사에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난다. 우리는 ‘빨강’ ‘숨쉬기’ ‘깨달음’에 해당하는 어떤
대중 매체와 소셜네트워크(SNS)의 발달로 정보가 흘러 넘쳐 여과되지 않은 주장들이 한없이 돌아다닌다. 이런 폐해를 막으려면 그 근원을 찾아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근원의 몸체는 폐해를 생산하는 가짜 지식인들이다. 이번 기회에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경험한 한국사회의 사이비 지식인의 예를 몇 제시해 보겠다.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두 논객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서울대 출신이지만 독일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못 받고 석사만 들고 돌아왔다. 한 사람이 쓴 책을 보면 유학 6년 후 석사를 받았
우리는 만물이 삼차원적 존재로서 시간이 경과하며 변화를 겪어도 동일한 대상으로 지속한다고 믿는다. 3차원적 물체인 바위, 나무,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 모두 시간 속에서 한 동안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4차원적 존재’라는 이 글의 제목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이름같이 들리고, 이번 글에서는 4차원에서 온 외계인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은 공상과학과는 아무 상관없다. 나는 만물이 3차원적 존재가 아니라 실은 4차원적 존재라는 점을 논하려 한다.만물이 4차원적 존재라니, 무슨 뜻인가
서구인이 자랑하는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은 물리세계를 수학을 통해 접근해서 가능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그들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보았고, 이런 형이상학적 가설은 뉴턴이 우주의 변화와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며 확증됐다. 뉴턴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붓으로 그리지 않았다. 신의 섭리나 도(道), 음양오행 또는 이(理)와 기(氣)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의 가장 엄밀하고 정교한 개념적 도구인 수학으로 그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성공했다.뉴턴
붓다의 자비(慈悲)는 원래 따뜻한 마음으로 포근히 품어주는 덕이 아니라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아무 감정의 개입이 없는 상태로 행해지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이 정(情) 많은 불자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든다. 아니, 자비가 ‘무정(無情)한 배려’라니, 얼토당토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붓다의 자비는 감정이나 집착 없이 행해지는 타인의 번뇌에 대한 배려가 맞다.한편 ‘자선(慈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charity’가 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논하는 ‘principle of charity’에서는 엉뚱하게도 ‘
‘철학’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어 ‘philosophia’의 번역어인데, ‘지혜에 대한 사랑 (love of wisdom)’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지혜는 지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철학자들의 지혜에 대한 사랑과 불교에서 가르치는 지혜(智慧)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지혜롭다(wise)는’ 말은 ‘많이 안다’ 또는 ‘유식하다(knowledgeable)’와 의미가 다르다. ‘많이 안다’는 말은 주로 ‘정보를 많이 습득해서 숙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이것저것 많이 읽고 들으면 유식해질 수 있다.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