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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전체는 부분의 합(合) 이상이 아니다

불교와 창발론 동일시 주장 설득력 없다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의 속성을 창출한다’는 창발론 인기
이미 존재한다면 창발 못해…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야 가능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가능…無로부터 有 나올 수 없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우리는 ‘전체(whole)는 부분의 합 이상’이고 ‘세계 또한 구성요소의 합 이상’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못 드는 물건도 여럿이 모이면 들 수 있고, 생명 없는 분자들이 많이 모이면 생명체가 탄생한다. 들을 때마다 신기하고 근사하다. 그런데 진리는 이처럼 멋지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따뜻하지 않으며 때론 냉담하다. 불교의 가르침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이 아니라고 할 뿐만 아니라 전체의 실재(實在) 자체를 부정한다.

현재 한국 불교계 일각에서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의 속성을 창출한다는 창발론(創發論)이 인기다. 창발론은 ‘밀린다왕문경’과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이 부정하는 전체의 실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 전에는 없던(無) 속성이 새로 생겨난다(有)는 주장이다. 전에도 몇 차례 이 문제를 언급했지만 본고에서 좀 더 진지한 논의를 시도해 보겠다.

초기경전인 ‘밀린다왕문경’에는 수레를 예로 들어 수레라는 ‘전체(whole)’는 실재하지 않고 단지 “수레”라는 이름 또는 지시어만 존재할 뿐이라는 논증이 있다. 바퀴, 널빤지, 깃대 등 여러 부품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수레가 아니다. 그 어떤 부품도 수레의 본질(아뜨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부품(또는 부분)을 모두 모아 전체가 되더라도 없던 수레의 아뜨만이 새로 생겨날 수 없다. 수레의 아뜨만이 없기 때문에 수레는 실재하지 않는다. “수레”는 이렇게 부품이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된 상태를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하다.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에도 집합체로서의 전체가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어 공(空)하다는 논증이 전개된다. 초기불교와 초기대승불교 모두 전체가 허상(虛像)임을 논증한다. 한편, 서양에서는 일상의 예를 통해 전체가 허구(fiction)임을 증명한다. 제임스의 책상은 네 다리 하나하나가 1.5kg이고 위의 널빤지는 4kg이다. 이 다섯 부분을 모두 더하면 10kg이고 전체로서의 책상도 물론 10kg이다. 만약 부분들을 합친 것(10kg)과 별도로 전체로서의 책상(10kg)이 실재한다면 길동이가 쓰는 책상은 두 무게를 합쳐서 20kg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책상이 10kg만 나간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전체나 부분들 둘 가운데 하나는 실재하지 않아야 옳다. 전체는 부분들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부분들 하나하나는 전체 없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전체는 허구다.

이제 예를 통해 창발론의 요점을 살펴보겠다. 물의 분자구조는 H2O다. 수소 원자 둘과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해 있다. 창발론은 우리가 수소 원자와 물 원자의 구조와 속성을 모두 알아도 물 분자가 갖는 속성, 예를 들어 투명하고 무색·무취·무미이며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속성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속성은 수소원자나 산소원자의 속성과는 독립적으로 전체로서의 물분자가 창발한 새로운 속성이다. 이런 속성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세계에 이루어진 순증가(net addition)라고 주장된다. 물뿐만 아니라 불 같은 수많은 현상에도 동일한 논의가 적용된다.

그런데 물을 예로 든 위의 논의가 오류임이 밝혀졌다. 현대과학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의 구조를 더 알아내어 그것들이 물분자로 결합하는 방식으로부터 물분자가 빛을 투과시켜 투명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수소와 산소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면 그것들이 결합해 생기는 물분자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물이 무색·무취·무미이며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는 속성을 새로 가진다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 우리와 감각기관이 다를 외계인에게 물은 무색·무취·무미가 아닐 수 있으며,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대신 독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창발되었다는 속성 가운데 어느 것도 객관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이 모두는 물분자와 인간의 감각기관 및 의식의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나온 산물이고 연기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이라서 모두 자성이 없어 공하다.

창발되어 실재한다는 속성의 존재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의 투명성은 수소원자와 산소원자 안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1) 이미 존재한다면 창발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없던 것이 새로 생겨야 창발이기 때문이다.
(2) 이미 존재하지 않아도 창발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명성이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부터만 나오고 다른 것들의 결합으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서양의 창발론자들은 (2)에 반대한다. 그들의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듯이 만물에 그런 창발현상이 생긴다고 본다. 그러면서 창발현상을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경건한 마음(natural piety)으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내게 이런 주장은 마치 공중에서 갑자기 꽃이 생겨나 피어난다는 말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서양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불교계 학자들 일부가 창발론에 찬성하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1) 수없이 많은 (예를 들어 100가지) 해석을 허용하는 복잡한 화엄사상과 (2)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수없이 많은 (100가지) 이해가 가능한 복잡계 이론을 (3) 각각 그럴듯한 해석 하나씩을 골라 (100×100=) 10000분의 1의 확률로 서로 연결시켜 (4) 불교의 가르침이 복잡계 이론과 그 이론이 함축하는 창발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물분자가 보이는 여러 모습은 자성을 가지지 않은 수소와 산소가 여여(如如)하게 모이고 흩어지는 연기의 과정에서 인간의 감관과 의식이라는 조건들과 접촉하면서 (삼사화합)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공(空)한 현상들이다. 그러나 창발론은 물을 이루는 산소와 수소에 본질 즉 자성이 있고, 또 이 두 자성과는 상관없는 투명성과 무색무취 등의 자성이 이 세상에 덤으로 생겨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서양 고대로부터의 통찰과 또 만물이 공(空)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90호 / 2021년 6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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