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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수학(數學)과 마음

마음은 관념 오가는 이름일 뿐…실재하지는 않아

데카르트·로크 등 근대 철학자들은 수학으로 물리세계를 이해 
버클리는 신의 의식 속에 마음을 비롯한 만물 존재한다고 믿어
관념론과 불교 유식은 수학적이지 않아도 존재 위협 받지 않아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서구인이 자랑하는 17세기 유럽의 과학혁명은 물리세계를 수학을 통해 접근해서 가능했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그들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보았고, 이런 형이상학적 가설은 뉴턴이 우주의 변화와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며 확증됐다. 뉴턴은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붓으로 그리지 않았다. 신의 섭리나 도(道), 음양오행 또는 이(理)와 기(氣)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인간의 가장 엄밀하고 정교한 개념적 도구인 수학으로 그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성공했다.

뉴턴 이전에도 데카르트나 로크 같은 근대철학자들은 물리계를 수학적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물리계가 아주 작은 입자로 돼 있다고 보았고, 그 입자의 모양과 운동·속도·밀도 등의 기본적인 속성을 수학적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이런 속성이 물체 그 자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물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17세기 로크는 이를 ‘1차속성들(primary qualities)’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 일상의 경험은 수학적 물리학이 표현할 수 없는 로크의 ‘2차속성들’로 넘쳐난다. 색깔·소리·냄새·맛 그리고 촉감이 그것이다. 물리학이 전하는 세계의 모습 만을 확신한 로크는 2차속성들은 단지 입자들의 모양·운동·속도·밀도 등에 대한 정보를 우리 의식이 자의적으로 해석해 나온 결과일 뿐이어서 그런 속성들은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마치 둥근 입자를 가진 음식은 달게 느껴지고 육면체 입자로 된 음식은 쓰게 느껴진다는 것인데, 오늘날 우리 상식과 비슷한 견해다.

수학적 물리학이 우리 세계를 완전히 정복할 것 같지만 마음은 난공불락이다. 아일랜드 교회의 주교였던 버클리는 “오감(색·성·향·미·촉)의 경험내용인 2차속성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1차속성 존재도 확인할 수 없다”며 오히려 2차속성이야말로 진정한 속성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버클리의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색·성·향·미·촉을 통하지 않고는 물체의 모양·운동·속도·밀도 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마음을 비롯해 만물이 모두 신(神)의 의식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신을 제외하면 우리 마음 또는 의식과 그 속에 존재하는 관념들(ideas)이 존재하는 모두다. 사물이 의식 또는 정신이 가진 관념(의 집합·다발)이라고 보는 관념론(idealism)은 자연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관념론이 물리주의보다 존재세계를 더 잘 설명한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밑에서 살펴보겠다.

정신의 우선적 존재를 인정하고 물리세계를 그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관념의 집합이라고 보는 설명은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 반면에 물리계의 우선적 존재를 받아들이면 물리계로부터 의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단백질 덩어리인 뇌의 표면에 어떻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의식의 세계가 열리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데카르트주의자는 물질과 정신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보지만, 이 또한 물질과 정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흄은 로크와 버클리가 나름대로 인정한 실체(實體)의 존재를 부정한다. 로크는 속성들이 모여 있는 기체(基體)로서의 실체를 상정하지만, 흄은 우리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기체는 ‘불가해한 괴물’이라며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버클리가 주장한 신이나 실체로서의 자아 또는 마음의 존재 또한 부정한다. 흄에게는 오직 관념들만이 존재하며, 모든 대상은 단지 이런 관념들의 다발(bundle)일 뿐이다.

버클리의 관념론이 유식론(唯識論)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가 신과 마음의 실재를 인정한다는 점이 유식론과 다르다. 유식론은 찰나마다 생멸하는 의식과 그 안에서 변하는 다르마(종자)만을 인정하지 어떤 실재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념들의 다발만을 인정하는 흄의 견해가 불교와 더 가깝다. 자성이 없어 공한 만물을 기본적으로 환(幻)으로 보는 불교와 만물을 끊임없이 교체되는 무상한 관념들의 다발로 보는 흄의 관념론은 여러 모로 닮았다. 비록 그의 견해가 관념도 공하다는 통찰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현대인은 우주 만물이 물리학이 보여주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물리학은 수학으로 모든 물리현상을 (거의) 빈틈없이 설명·기술·예측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의식세계는 수학으로 설명이 잘 안 된다. 예를 들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믿음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20세기 초 수리논리학자들이 이런 시도를 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색깔·소리·냄새·맛 그리고 촉감의 경험내용 또한 수학으로 표현되는 뇌의 물리적 상태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상관관계의 본성에 대한 연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답보 상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식론과 관념론에서는 정신 안에 존재하면서도 물리현상으로 분류되는 관념들이 수학적으로 잘 설명된다는 점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의식내용이 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존재가 위협받지 않는다. 수학은 물리현상으로 분류되는 관념들에만 적용되는 방법론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리주의 입장에서는 수학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정신현상의 존재를 회의하여야 논리적으로 일관적인데, 유식 및 관념론에서는 정신현상뿐 아니라 물리현상의 존재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심신(心身) 상호작용의 문제도 상대적으로 잘 다룰 수 있다. 유식 및 관념론에서는 정신 안의 물리적 관념(또는 현상)과 정신현상에 우리가 적용하는 방법론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둘 사이 상호작용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의 현상 모두 정신 안에 존재한다고 보며 그 존재를 인정한다. 이와 같이 유식론과 관념론은 최소한 이론적으로 더 포용력이 있고 합리적이다.

마지막으로 불자라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마음이 독자적으로 실재하고 그 안에 여러 종류의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섯 명의 배구선수가 뛰는 팀이 ‘영축산독수리’라고 불려도 이 여섯 선수 외에 하늘을 나는 영축산독수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하는 것은 여섯 선수를 한데 묶어 ‘영축산독수리’라고 편리하게 부르는 이름뿐이다. 우리의 정신 또는 마음도 이런저런 관념이 오고가는 과정일 뿐이지만 편리상 묶어 ‘마음’이라고 부를 뿐이다.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름뿐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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