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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지식과 지혜

만물 실체 파악하는 심오한 지식이 바로 지혜

고대그리스 철학자는 지식과 삶 연결시켜 ‘하나의 지혜’ 추구
18세기 칸트 영향으로 존재실상과 우리의 삶은 둘로 쪼개져 
실상 꿰뚫어 보고 미혹 밝히면 깨달음에 이른다는 불교와 달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철학’이란 말은 고대 그리스어 ‘philosophia’의 번역어인데, ‘지혜에 대한 사랑 (love of wisdom)’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혜란 과연 무엇일까. 지혜는 지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철학자들의 지혜에 대한 사랑과 불교에서 가르치는 지혜(智慧)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지혜롭다(wise)는’ 말은 ‘많이 안다’ 또는 ‘유식하다(knowledgeable)’와 의미가 다르다. ‘많이 안다’는 말은 주로 ‘정보를 많이 습득해서 숙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이것저것 많이 읽고 들으면 유식해질 수 있다. 한편 ‘wise’하다는 것은 단지 책 읽고 이야기 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 살아가며 경험하면서 얻는 삶과 관련된 옳은 판단과 좋은 행위를 지속해야 가능하다.

26세기 전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을 시작한 사람들이 진행한 작업을 살펴보면 그들의 지혜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목표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단편적 지식의 습득이 아니었다. 나무의 생장 패턴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형태,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 등은 모두 유용한 지식이었지만, 이런 지식을 추구한 사람을 철학자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던 초기철학자들은 만물의 존재와 작용을 가능케 하는 근원을 뚫어 보려 했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보았던 철학자는 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물의 작용원리가 만물의 생성변화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런 근원을 불이라고 본 사람도 있었고,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로 보거나 원자(atom)라고 본 철학자도 있었다. 이들은 모든 존재자의 존재적 근원과 작용방식을 관철하는 원리를 알아내려고 했다. 이와 같이 ‘가장 근본적인 것에 대한 깊은 지식의 추구’가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되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가장 깊은 근원을 뚫어 보는 심오한 지식이기 때문에 특별히 지혜의 차원으로 승격된 셈이다. 18세기 독일의 칸트도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을 다루지 않고 그런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인식구조를 연구했다. 그의 철학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상세계의 가장 깊은 배후를 우리 인식구조의 특성에서 캐고 있기 때문에 지혜의 영역에 속하는 작업이었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상 ‘지혜(wisdom)’라고 표현하는 ‘삶을 잘 사는 능력’에 대한 논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좋고 올바른 삶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단지 어떻게 살아야 좋고 옳으냐는 문제뿐만 아니라 선(good)과 옳음(right) 그 자체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통해 우리의 도덕에 대한 이해를 깊고 넓게 해 주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현상의 배후에 대한 지식과 좋은 삶에 대한 통찰을 연결시켜 논의하고 이해했다. 연관된 두 측면을 가진 하나의 지혜를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철학자에 따라 이 두 측면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가 많이 다르다. 존재세계의 심오한 진리에 따라 사는 삶이 좋고 옳은 삶이라고 본 철학자도 있지만, 자연세계에 대한 궁극적 진리가 우리가 잘 사는 방식과는 연관이 없다고 본 철학자도 많다.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본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불과 같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받아들여 살았고, 모든 것을 죽으면 흩어질 원자의 집합으로 본 사람은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져 쾌락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도 했다. 고대 스토아학파와 17세기 스피노자는 존재세계의 엄격한 인과율과 결정론을 받아들이며 삶도 극도로 합리적이고 금욕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18세기 칸트는 자연세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통찰과 우리 삶을 잘 사는 방법은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우리 순수(이론) 이성의 영역과 삶과 관련된 도덕을 연구하는 실천이성의 영역은 별개라고 하며 둘을 섞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칸트에 영향 받은 많은 철학자들도 이 둘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지혜들이라고 규정지으며 전적으로 다른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고대로부터 하나로 사랑받았던 지혜가 둘로 쪼개져 버린 셈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향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자연세계의 일부인 우리에게 자연세계를 관철하는 진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진리가 적용될까? 그래서 우리는 존재세계의 다른 부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잘 살 수 있을까? 중세 이후 서양인들은 유일하게 영혼을 가진 인간이 자연세계의 다른 생명체와는 반드시 달리 보아야 한다는 집착을 보여 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오랫동안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유기물로 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간주했다. 아무렇게나 다뤄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좋은 삶에 대한 진리와 그 밖의 존재세계에 대한 진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보기도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종교 문화적 부담이 없는 불교는 중세이후의 서양인들과 다른 견해를 가져 왔다. 불교는 서양에서 철학을 태동시킨 ‘하나의 지혜’를 분리시키지 않고 소중히 보호해 온 전통을 지니고 있다. 불교에서도 ‘지혜(智慧)’라는 말이 다양한 맥락에서 다소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혜가 (1) 사물의 실상을 뚫어보아 미혹을 밝히고 (2) 그것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만물에서 미혹이 걷힌 실제의 모습을 파악하는 일은 의식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지적작업으로서, 이렇게 얻은 심오한 지식은 지혜의 차원으로 승격된다. 예를 들어, 만물의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에 대한 이해와 각성은 지혜로 불려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심오한 지식(지혜)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가장 높이 고양된 차원으로, 즉 깨달음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불교의 수행 가르침은 철학적 의미에서도 분명 지혜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불교는 서양인들이 둘로 쪼개어 잃어버린 ‘하나의 지혜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보전하고 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5호 / 2021년 3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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