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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과학이론과 사사무애

한 개념에 모든 개념 담겨 걸림 없이 연결 돼야

자연과학은 사물 간 연기 관계를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것
한 개념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많은 과학 이론이 동원돼야
주관의 존재세계, 있는 그대로 믿으면 계몽된 과학자 아냐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독자에게 묻습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어리둥절한 질문이다.

‘당신 글을 읽고 있다’ ‘과학이론과 사사무애라는 소제목을 보고 있다’ ‘허재경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다’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등….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단순한 질문 하나에도 관찰자가 보는 시선과 처한 환경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철학, 특히 과학철학에서 이미 폐기된 지 오래됐다. 어떠한 사물도 배경이론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눈 자체가 수많은 이론을 담고 있다. 카메라 렌즈는 눈의 구조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나 눈은 광학이론보다 더 복잡한 이론과 연관돼 있다.

이에 더해 망막에 도달한 광학신호가 신경 체계에 따라 뇌로 전달돼 해석되는 과정을 고려해보면 시각 경험 자체가 수많은 이론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감각에 포착된 사물이 이론에 물들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없다면 관측 기구나 실험 도구를 통해 얻는 데이터도 해당 기기와 관련된 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정보라고 볼 수 없다.

양자역학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인식 장치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 소립자세계에도, 거시세계에도 없다. 그러므로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주장은 참일 가능성이 없다. 그런 실상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실상을 ‘자성이 없어 공한 실제 모습’ ‘서로 무애한 모습’ 등으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 모습’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론에 의해 채색돼 있다. 때문에 우리는 배경이론없이 어떠한 사물도 그 존재를 확보할 수조차 없다.

자연과학이론은 질량·시간·공간 등을 물리량으로 환원하고 기호화해 수학을 이용해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관계로 이해한다. 기호들이 수학을 통해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뤄진 체계다.

개념과 기호가 상호 의존하며 연기하고, 연기하는 것은 공하기에, 개념과 기호는 자성을 결여한다. 그러므로 개념과 기호, 즉 이론을 통해서만 포착돼 이론에 물들 수밖에 없는 사물 또한 공하다고 판단돼야 마땅하다.

개념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질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개념에 주어진 이론 체계가 다른 (물리량의)개념들과 어떻게 수학적으로 관계되는가를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즉 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 전체가 동원돼야 한다. 그러다보니 한 개념 안에 각각의 이론이 들어가 있으며 이는 전체가 들어가 있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면 모든 개념은 이론적으로 서로 존재론적 위상이 동일할 것[相卽]이다. 동시에 모든 개념은 다른 모든 개념에 각각 들어가 있다[相入]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들로 포섭되어서만 존재하는 사물들 각각도 서로 그 존재론적 위상이 동일하고[相卽] 서로 들어가 있다[相入]고 이해할 수 있겠다.

자연과학은 기본적으로 사물들 간 연기관계를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모든 이론은 정합적(整合的, coherent)이어야 한다.

서양 철학 인식론에서 ‘정합적’이라는 말은 그 이론체계 안의 법칙과 주장이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내용이 일관적인’ ‘개념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등의 의미로 이해된다. 붓다의 연기를 알고 있는 나는 이것을 ‘이론의 모든 부분이 서로 의존 관계에 있는 (상호의존적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이론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서로 논리적이어야 하며 매끄러워 걸림이 없어야[無碍] 정합적이다.

성공적인 물리학 이론이라면 그 체계가 정합적이겠다. 또 그 정합적인 이론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포섭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렇게 개념적으로 포섭돼야 존재하는 만물은 그 이론 체계 안의 개념이나 법칙과 마찬가지로 서로 걸림이 없이 매끄럽게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이렇게 현대 과학철학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과학이론의 요구 조건인 정합성은 앞서 논의한 만물의 상즉상입(相卽相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학이론의 존재론적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구불변의 자성을 지닌 어떤 굉장한 진리, 또는 그 진리에 해당되는 존재자의 현현(顯現)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변 여하에 따라 누가 보통 과학자인지, 아니면 철학적 사고가 가능한 과학자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이론은 우리 인식능력이 만든 개념 체계다. 존재세계는 이미 인식 주관의 개념적 투사에 의해 물들여진 세계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개념체계와 과학이론은 존재세계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폐기되고 교체되는 과정을 겪으며 변화해 왔다.

혹자가 지금 우리 세대가 손에 들고 있는 과학이론이 절대불변의 진리여서 존재세계를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보통 과학자일지는 몰라도 철학적으로 계몽된 과학자는 아니다.

이론의 한계와 변화 가능성을 한 걸음 떨어져 이론 밖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깨친 과학자일 것이다. 이런 과학자는 이론을 한동안 유용하게 쓰는 도구 정도로만 여긴다(현대 과학철학의 도구주의, instrumentalism).

도구가 쓸모 없어지면 다른 도구로 교체되기 마련이고, 어떤 도구에도 영구불변의 고정된 자성은 없다. 이렇게 공(空)한 도구로 변화하는 무상한 존재세계를 그때그때마다 편리하게 잠시 틀에 넣어 이해하고 정리해보려는 노력이 과학적 작업이다.

그래서 과학이론 안의 모든 개념은 그냥 이름뿐이다. 그것에 상응하는 고정된 존재자를 가지지 않는다(전통적인 유명론, 唯名論).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과학이론의 존재론적 위상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88호 / 2021년 6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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