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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자유의 가르침

열반은 ‘불행하지 않은 상태’ 그것이 전부다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게 해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게 열반
신으로부터 영혼 구원받아 충만한 환희 느끼는 자유와는 달라
중도는 양극단 벗어난 자유…사물도 상주와 단멸 벗어나 존재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은 매일 경전을 읽고 쓰고 논의하며 참선 수행에 정진한다. 이들이 이토록 애쓰는 이유는 이번 삶이 다하기 전에 깨달음을 얻어 해탈과 열반에 이르고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해탈이란 나고 죽는 윤회의 굴레로부터 벗어남이고, 열반은 번뇌의 불길이 꺼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니까, 불자들이 지향하는 해탈과 열반은 모두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수행의 목적이 자유인 불자의 인생관은 환희가 충만한 상태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서구인과는 많이 다르다. 서구인에게는 영혼이 있어야 하고, 그 영혼이 신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며, 또 그 구원을 통해 기쁨에 겨워 살아야 행복한 삶이다. 비유를 들자면, 캔버스는 여백을 남기지 않고 모두 물감으로 가득 채워야 그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고, 또 집의 벽에는 온갖 장식을 더해 빈 공간을 모두 없애야 아늑하고 따뜻한 집이 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비어있어 자유로움’에 불안해한다.

불자는 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추구한다. 자아나 영혼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아(無我)를 받아들이고, 절대신을 인정하지 않아 신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넘치는 환희에 빠지기보다는 단지 고뇌가 사라져 자유로운 적정(寂靜)의 상태를 이상(理想)으로 삼는다. 여백이 많아 자유롭고 담백한 수채화나 수묵화가 좋고, 가득 쌓인 살림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하루가 더 편안하다. 불자에게는 충만한 행복보다는 비어있는 자유가 어울린다.

나는 붓다의 ‘중도(中道)’를 양극단을 피하여 그 중간의 적절한 지점을 선택하라는 말씀으로뿐만 아니라, 양극단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지향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중(中)’을 ‘자유’라고도 해석한다. 수행이 너무 고되어 고행으로 흐르거나 그 반대로 너무 쉬워 나태의 길로 접어드는 두 극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수행의 중도가 되겠다. 수행에 있어서 어느 극단에 집착해 스스로 굴레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피해, 이런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불자라면 개인의 수행 차원뿐 아니라 사물의 존재방식 또한 상주(常住)와 단멸(斷滅)의 양극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도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하겠다. 고정불변하게 상주하는 답답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그 반대로 절멸되어 허망한 단멸의 상태로부터도 벗어난 것이 사물이 이 세계에 묘하게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물의 자유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가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깨달음은 스스로와 세계에 관한 진리의 깨침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또한 자유로움에 대한 깨달음이다. 붓다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의 하나인 무아(無我)란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고정불변한 그 무엇’으로서의 자아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결코 변하거나 파괴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구별되는 유일한 개체로 만들어 준다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면서 흐뭇하고 뿌듯해한다.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 삶을 지향할까?

스스로에게 고정불변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 과연 그렇게 좋을까? 예를 들어, (출가수행자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고정불변한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똑같은 음식만 먹으며 똑같은 옷만 입어야 한다면, 참 답답하고 한심하여 그런 생활을 탈출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에게 정말 고정불변한 자아나 영혼이 있어 영원히 아무 변화 없이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천만다행으로 나는 불자여서 그런 자아나 영혼이라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무아(無我)의 삶을 마음껏 살 수 있어서 신나기만 하다. 무아 또한 자유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또 존재세계의 모든 것이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에 꽉 붙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조건과 어울려 끊임없이 생성·지속·변화한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도 펴셨다. 만약 이 세계의 사물에 불변의 자성이 고착되어 있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못하여 모든 것이 멈춰버린 죽은 곳이 되고 말 텐데, 다행히 우리 사바세계는 붓다의 연기법이 진리로 작동하고 있어 변화가 무쌍해 좋은 곳이다. 조건에 의존해 생멸하다보니 자성을 가질 수도 또 그럴 이유도 없어 만물은 자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붓다의 연기와 공도 역시 자유의 가르침이다.

이제 다시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불교적으로 접근해 보자.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충족감을 행복으로 생각했고, 근대 이후의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들은 정신적 및 육체적 쾌락을 행복으로 여겼다. 이들 모두 우리의 의식을 충족감 또는 쾌락의 감각으로 가득 채워야 행복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실현할 수 있고 또 의식을 쾌락으로 꽉꽉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도대체 몇이나 있을까. 설혹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의식이 아무런 빈자리도 없이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숨 막힐 듯 갑갑하지 않을까?

여러 해 전부터 나는 불자들에게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해 왔다. 마치 논리를 이용한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반드시 어떤 신나는 감각이 존재하는 상태는 아니다. 적절히 행복한 느낌이 들어 나쁠 것은 없지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지도 또 불행하지도 않은 그냥 담담한 상태 또한 불교에서는 행복으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잠재력 실현을 통한 성공이나 쾌락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의 불교적 행복이 적극적으로 무엇인가가 충만해야 하는 서구식 행복보다 더 지혜로운 길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열반에 대한 오해를 다시 한 번 경계하고자 한다. 열반이란 열락(悅樂)과 아무 상관이 없다. 열반은 말 그대로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고뇌가 없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말하자면, 열반은 ‘불행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게 전부이다. 열반은 결코 극도의 즐거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열반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극도의 자유로움일 것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604호 / 2021년 10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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