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5. 정토에 살어리랏다

각자 속한 세계 ‘정토’ 만드는 건 오로지 내 몫

더 쉽게 깨닫고 열반 이를 수 있도록 자비로 설계된 존재세계
사방을 둘러싼 모든 사물이 오직 정진하는 불자 위해 만들어져
정토는 멀고 신비로운 곳 아냐…지금 살아가는 사회가 곧 정토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숨 쉬는 모든 순간을 깨달음과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그 존재이유를 찾는 이가 불자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의 깨달음을 위해 매순간 혼신의 힘을 불태우는 삶이 그가 정진하는 삶이다. 불자라면 불도의 완성을 서원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두기 어렵다. 그리고 그 서원은 근본적으로 모든 이의 성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존재세계 전체가 불자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정토(淨土) 세계다. 그곳에는 사방을 둘러보고 위아래를 살펴보아도 모든 사물이 열반을 성취하는 데 쉽게 쓰이도록 이루어져 있다. 정진하는 불자에게 좋은 세상이 정토이고, 불자가 지향하는 이상향이 정토이다.

그런 정토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절실한 심정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 그의 원력으로 정토에 태어난다는 대승의 오랜 믿음을 모르는 불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 불자가 이런 믿음을 쉽게 받아들이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그리고 불교를 많이 접하지 못한 분에게 아미타불 신앙을 전하기는 실제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은 불자들이 서양종교의 절대신이나 선지자의 존재에 의아해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정토가 오랜 시간 여행해 도달하는 어느 멀고 먼 신비로운 나라도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사는 합리적인 불자라면 정토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이루어야 할 불자들의 멋진 세상이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나는 우리의 이 상식적 견해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의 예를 비유로 삼아 논의해 보겠다.

플라톤은 사물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천상에 존재하는 형상의 복제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내 앞의 책상은 천상에 있는 책상의 완벽한 형상이 이것에 예화(例化)되어 존재하고 있다. 책상의 형상은 내 책상의 실재(實在)를 가능하게 하고, 또 우리가 그것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가해성(可解性,  intelligibility)의 근원이다. 플라톤은 만물 각각에 그것을 실재하고 이해하게 해주는 근원으로서의 형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모든 형상 자체의 실재와 가해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궁극의 근원으로서 ‘선(善)의 형상’의 존재도 상정한다. 그는 태양을 비유로 들면서, 태양이 만물을 생성시키고 (실재의 근원) 또 우리가 만물을 볼 수 있게 (가해성의 근원) 해 주듯이, 선의 형상이 모든 형상과 나아가 우주 만물의 실재와 가해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는 신플라톤학파에 의해 계승되고, 기독교인들이 이 철학을 받아들여 그들의 초기 신학을 완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플라톤의 태양이나 선의 형상과 같이) 만물을 창조했고 또 끊임없이 계속 산출해 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산출(production)이 신의 본성이며 그의 의지 표현이다. 신은 그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그의 본성과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예수의 삶을 본받고 또 예수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수는 “가난한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어려운 이웃과 힘든 사람을 돕는 데 삶의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의 ‘고백록’에 나온 관련 구절은 정교한 철학논증으로 되어 있지는 않아서 그 구절로부터 추론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로부터 ‘사랑의 형이상학’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의 본성은 존재의 산출인데, 그의 화신인 예수가 어려운 이를 위해 사랑을 산출하라고 가르쳤으니, 인간은 어려운 이의 행복을 도모하는 사랑의 산출을 통해 신의 섭리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존재이유라는 결론조차 가능할 것 같다.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불자들의 아미타불은 고뇌에 시달린 중생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깨닫고 열반에 이를 수 있도록 무한한 자비심으로 그의 정토를 창조했다. 정토 세계 어느 산자락 소나무도, 하늘을 나는 구름 한 점도, 연못에 비친 맑은 달도, 그리고 길가의 풀잎사귀 하나 등 모든 존재자가 그 안의 중생이 성도하여 고뇌를 벗어날 수 있는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미타불의 자비로부터 산출되었고, 그것은 모두 중생의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 쓰이게 되어 있으니 이런 쓰임 또한 아미타불의 끊임없는 자비행의 현현(顯現)이다.

자비심이 정토계의 모든 사물을 창조한 근원이고, 또 그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무아와 연기를 받아들이는 이 정토세계 안 불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연스럽게 그와 다른 모든 이의 깨달음과 열반을 향해 이루어지는 자비행이다. 그래서 불교의 정토사상은 가장 포괄적인 ‘자비의 형이상학’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의 존재 이유가 자비이기 때문이다.

불자가 ‘법화경’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환희심이 있다. ‘법화경’ 속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설법하신다. 중생을 단지 어리석고 미숙하게 보신 것이 아니라 모두 부처님과 같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며 격려하신다. 데바닷타마저 그렇다고 하신다. 이 세상 다른 어느 종교의 절대자가 이런 가르침을 펼까? 이와 같이 자비로운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불제자는 정말 복도 많다.

우리 모두가 미래에 부처가 되면 각자 아미타부처님처럼 세계 전체를 멋지게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크고 작은 좋은 사회를 만들면서 살아가면 더 신나지 않을까?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그런 사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는 모든 이의 깨달음과 열반을 서원하는 불자라면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각자가 속한 가족, 학교, 직장, 나라와 같이 크고 작은 사회를 모두가 깨달아 고뇌를 끊는 데 가장 적합한 크고 작은 정토사회로 만들며 살아가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크고 작은 정토사회가 그득그득한 곳이 아마도 우리의 정토세계일 것이다. 그런 정토에 살고 싶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608호 / 2021년 11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