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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4차원적 존재

만물은 ‘찰나멸 찰나생’ 반복하는 단층 배열

만물은 시간 선상에서 동일하게 존재하는 3차원적 존재 아냐
동일한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기에 변치 않는다고 착각할 뿐
만물은 4차원적 존재로 이뤄져 무상·무아 가르침과도 상통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우리는 만물이 삼차원적 존재로서 시간이 경과하며 변화를 겪어도 동일한 대상으로 지속한다고 믿는다. 3차원적 물체인 바위, 나무, 동물, 그리고 우리 인간 모두 시간 속에서 한 동안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4차원적 존재’라는 이 글의 제목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이름같이 들리고, 이번 글에서는 4차원에서 온 외계인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은 공상과학과는 아무 상관없다. 나는 만물이 3차원적 존재가 아니라 실은 4차원적 존재라는 점을 논하려 한다.

만물이 4차원적 존재라니, 무슨 뜻인가? 3차원적 대상이 시간선상에서 변화하면서도 계속 동일한 물체로 존재한다는 우리의 상식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철학은 소크라테스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해 와서 인기가 없는데, 없는 인기 더 떨어질 소리 한 번 더 하겠다. 그렇다. 만물이 3차원적 존재로서 시간선상에서 동일한 존재로 지속한다는 우리의 상식은 틀렸다. 엄밀한 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형성된 일반의 상식이 언제나 옳다는 믿음이 오히려 순진하다.

3차원적 대상이 오랜 시간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한 존재로 지속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방 창밖에 서 있는 나무는 수십 년 전 작은 묘목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2층 집만큼 키가 컸고 줄기도 여러 배 더 굵어졌다. 계절마다 새 잎이 나고 단풍도 들고 낙엽을 떨구는 등 온갖 변화가 무쌍하다. 이 나무는 수십 년 전의 작은 묘목과 동일한 나무일 수 없다. 이 나무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많은 변화를 겪으며 생존하기 때문에 동일한 생명체로 남아 있지 않다.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동일하게 존속하는 것은 없다. 강, 호수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새 물이 들어오고, 있던 물은 나가기 때문에 한시라도 같은 강, 호수, 바다로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한강’ ‘천지’ 그리고 ‘동해’와 같이 동일한 이름으로 그것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마치 그것들이 변치 않고 존재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바위 같이 변하지 않을 듯 단단한 물체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과학은 원소나 소립자 또한 변한다고 밝혀냈다. 이와 같이, 3차원적 존재로서의 물체가 시간선상에서 동일한 물체로 존재한다는 상식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존재의 실제모습[實相]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사물의 동일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반대로 부단히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나는 만물을 만물 각각으로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만물이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상식에 토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동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는 변화의 과정 자체가 사물의 존재방식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만물을 시간선상에 존재하는 어떤 과정으로서의 4차원적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4차원적 존재로서의 사물은 천체물리학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시공연속체(a single continuous spacetime worm)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4차원적 존재를 과정(process) 전체 또는 연속체라고 하면 이는 시공간에서 어떤 경계(boundary)를 가진 하나의 전체(whole)의 존재를 가리키게 된다. 하지만 ‘밀린다왕문경’과 관련해 내가 다른 글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 불교에서는 부분과 대비되는 전체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현대 분석형이상학의 부분전체론(mereology)의 주류 견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체로서의 과정 또는 시공연속체는 이름만 가진 가상의 존재일 뿐이지 실재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다시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자전거 하나의 무게가 10kg다. 자전거는 바퀴와 프레임 등 많은 부품(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들을 모두 합친 무게도 10kg다. 만약 전체로서의 자전거가 실재한다면 그것이 독자적으로 10kg가 나가겠고 부분들을 합쳐도 10kg가 될 테니, 이 자전거는 결국 20kg가 나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10kg밖에 안 된다는 점을 안다. 그래서 전체는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한편 만약 전체가 바로 부분들의 합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면 (전체=부분들의 합) 실제로 무게가 10kg밖에 안 된다는 점이 설명된다. 그러나 전체는 하나이고 부분들은 다수인데, 하나와 다수가 동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전체와 부분은 동일할 수 없다. 결론은 전체는 허상(虛像)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이 4차원적 존재를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연속체로 보면 실은 대단히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연속체가 시공의 좌표에서 조금이라도 어떤 부피를 갖는다면 그것은 전체가 되어 곧 허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결국 부피 없이 찰나에 존재하는 사물의 존재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그래서 만물을 순간순간 생멸하는 시공(時空· spatiotemporal)의 단계들(stages) 또는 단층들(slices)의 배열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식은 만물이 찰나멸 찰나생한다고 보는 불교와 상통한다. 

현대 분석형이상학자들 여럿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견해는 만물이 무상(無常)하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차이가 없고, 단계 또는 단층들의 배열이 연속체로서의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분명 이와 같은 단계 또는 단층들의 배열이 만물이 시간선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일 것이다.

만물 가운데 하나인 나 또한 4차원적 존재임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붓다는 우리가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무아가 진리라고 설하셨다. 요즘 영어권에서는 오온을 다섯 개의 과정(five processes)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다섯 개의 과정이 서로 엮여있는 사차원적 연속체가 우리 존재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게 해 주는 번역이어서 반갑다. 그러나 여기에 위에서의 논의를 다시 가져오자면, 우리는 이 다섯 개의 과정 각각을 일종의 전체를 이루는 시공연속체로 보아서는 안 되고, 찰나마다 생멸하는 단계 또는 단층들의 배열로 보아야 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81호 / 2021년 4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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