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자비의 원리

자비는 상대방 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

이념 집착으로 의사소통 불가능한 이들은 자비원리 무시하는 것
서양사 종교전쟁, 동양의 훼불이 대표 사례…선교 논쟁 마찬가지
자비원리 소화 못한다면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태도라도 갖춰야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붓다의 자비(慈悲)는 원래 따뜻한 마음으로 포근히 품어주는 덕이 아니라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아무 감정의 개입이 없는 상태로 행해지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이 정(情) 많은 불자들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든다. 아니, 자비가 ‘무정(無情)한 배려’라니, 얼토당토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붓다의 자비는 감정이나 집착 없이 행해지는 타인의 번뇌에 대한 배려가 맞다.

한편 ‘자선(慈善)’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charity’가 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논하는 ‘principle of charity’에서는 엉뚱하게도 ‘자비의 원리’로 번역된다. 여기서 자비의 원리란 상대방의 말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그 말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의 지성(知性)에 대한 긍정적 배려를 함축하기 때문에 ‘자비의 원리’라는 번역이 옳다.

우리는 평소 자비의 원리를 실천한다. 학교에서는 교과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 있는 이야기와 주장이 서로 앞뒤가 맞고 옳을 것이라고 전제하며 이해하려 노력한다. 불교 경전이나 철학 서적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 안의 내용이 대부분 옳고 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해석하려한다.

역사상 전례가 없지는 않지만, 자비원리를 철학적으로 확립한 사람은 20세기 후반 미국의 데이비슨이다. 그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그리고 나아가 다른 사회나 다른 나라 사람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기본 원리 또는 갖추어야 할 지적(知的) 태도로서 자비의 원리를 제시했다. 자비의 원리는 다음의 두 요소로 되어 있다.

하나, 우리는 다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일관되며 명백히 모순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고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만난 일본인의 첫마디를 ‘지구는 둥글다’라고 해석했다면 그의 둘째 말을 ‘지구는 평평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누구라도 그렇게 분명히 모순되게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도 우리와 같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사고하며, 그의 생각도 우리처럼 대체로 서로 앞뒤가 맞는 정합적(整合的)인 체계를 이룬다고 가정해야 옳다.     만약 누군가가 ‘지구는 둥글다’와 ‘지구는 평평하다’를 동시에 진지하게 믿는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생각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실은 그 사람에게 과연 사고(思考)가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다. 또 논리적 추론이 불가능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잡다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도 해석하기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사람과 서로의 말과 생각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소통하며 산다. 이런 성공적인 의사소통 자체가 자비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증거다. 자비의 원리는 옳다.

둘, 다른 사람의 생각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옳다고 전제해야 한다. 우리가 처음 조우한 사람들의 말을 ‘해는 서쪽에서 뜬다’나 ‘북극성은 남쪽에 있다’와 같이 번역한다면 우리가 이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할 가능성은 없다. 이 사람들도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점을 알고 있고, 또 북극성은 북쪽에 있다고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의 말과 생각도 옳다는 가정 아래 그들을 이해하려 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의 생각은 대부분 세계와 주변 환경의 자극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형성된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로 형성된 생각과 믿음이 세계와 환경에 맞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성공적인 생존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체계도 대체로 옳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증거다.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해 대체로 옳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또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논리적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이 자비의 원리는 서양철학의 의미론과 인식론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지만, 나는 서로 올바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원리로 생각한다.

자비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분야는 한없이 많다. 이념 또는 무슨 ~주의(主義)에 집착해 그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모두 그르고 사악하다며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비의 원리를 부정하고 있다. 정치권에 흔한 이런 사람들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수인 자비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말하자면 의미론적 인식론적으로 ‘무자비한’ 사람들이다.

종교로 눈을 돌려 보자. 주지하듯이, 서양종교들은 자기들만 구원되고 타종교의 신자들은 모두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쳐 왔다. 자비의 원리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수천 년 동안 서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점철해 왔다. 다른 종교도 세상에 대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그쪽 신도들도 자기들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부정해 왔으니, 이 무자비한 종교들은 평화보다 전쟁을 더 많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동양도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성리학의 훼불과 불교 폄훼는 극도로 심했다. 한편 불교 안에서도 경전들을 읽다보면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왜 그다지도 깔보고 무시하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이 경전의 가르침만이 최고이고, 다른 가르침은 모두 어리석은 이들을 위한 방편적 가르침일 뿐이다’라는 구절들은 자비의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꼭 그렇게 주장해야 했나? 자비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조차 그런 무자비한 태도로 나와야 했나?

선교(禪敎) 논쟁도 마찬가지다. 지난 1000여년 동안 주로 선문(禪門)이 논쟁의 우위를 점해 왔는데, 글을 읽고 쓰며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선승의 놀랍도록 험한 태도는 아직까지도 그칠 줄을 모른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어리석어진다’며 학문하는 사람을 하근기 취급하는 무자비한 전통(?)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이제는 그만할 때가 아닌가?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옳게 해석하고 이해하려면 받아들여야 하는 자비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소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다른 견해의 존재 가능성을 허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라도 갖추어야 옳다. 더욱이 부처님의 자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불자라면 그래야 한다. 원효의 화쟁론도 자비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7호 / 2021년 3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