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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허깨비 찾기

기자명 홍창성

부처님 가르침은 명사 아닌 술어에 있다

동사·형용사로부터 시작된 명사에 형상 만들어 집착하는 건
‘허깨비’를 만들고 얽매이는 것과 같아…자성이 있다는 오류
연기·공·보리심·자비·깨달음·열반은 모두 술어로 된 가르침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문법에서 명사화(名詞化, nominaliza tion)란 형용사나 동사를 명사의 형태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명사화된 단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달리기’라는 명사는 ‘달리다’라는 동사로부터 생겨났고, ‘빨강’은 ‘빨갛다’라는 형용사로부터 나왔다. ‘앉기’ ‘숨쉬기’ ‘멈춤’ 그리고 ‘깨달음’ 같은 명사도 모두 동사로부터 시작됐다.

이렇게 형용사나 부사 또는 동사가 명사화하면서 마치 그런 명사에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난다. 우리는 ‘빨강’ ‘숨쉬기’ ‘깨달음’에 해당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대상이 세상에 따로 존재한다고 (잘못)믿곤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과연 그렇게 추상적으로, 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세계에 존재할까?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플라톤의 천상 세계 같은 곳에나 존재한다는 추상적인 형상(形相) 또는 상(相)이다. 그런 것은 우리가 만지거나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부터 ‘아름다움’이라는 명사를 만들고 그에 대응하는 상을 만들어 그것에 집착하기도 한다. 말을 가지고 놀며 허깨비를 만들고는 그것에 얽매이는 셈인데, 인간이 가진 재미있는 습관이다.

정의(正義)는 어떤 올바른(just) 행위들을 관찰하고 그 행위들로부터 추상하여 ‘정의(justice)’라는 상이 나온 것인데  우리는 이것에 존재와 자성(自性)을 부여해 존재세계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그것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근사한 것이라고 믿곤 한다. 그러나 형용사나 동사로부터 명사화하여 탄생한 것들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상들은 모두 어리석은 우리가 만들어 낸 허깨비다.

붓다는 인간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과정(process)으로 설명했다. 색은 우리 몸에 해당하고 수상행식이 의식을 구성한다. 붓다는 찾아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서 마음을 논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네 과정으로서의 수상행식(受想行識)을 가르쳤다. 과정으로서의 수상행식 하나하나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동사로 표현돼야 옳겠지만 모두 명사화된 단어로 지칭되고 있다. 그래서 수상행식이 마치 고정된 실체로서 실재하는 듯이 (잘못)들리곤 한다.

동사의 명사화로부터 비롯된 수상행식 각각의 실체화·실재화는 이것들이 마치 고정불변한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곤 한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해 자성이 없고 또 무상하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런데 혹자는 한 술 더 떠서 수상행식을 하나로 묶어 ‘마음’이라 칭하고는 마치 하나의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실재하는 듯 여기기도 한다. 이런 믿음은 모든 집합체가 자성이 없어 공하다는 나가르주나의 논증에도 어긋난다. 자성을 가진 실체로 존재한다는 마음은 허깨비다. 혹시 이 허깨비를 불성 또는 여래장이라고 보며 힌두교의 아트만과 차이가 없는 실체로 받아들이는 불자가 아직도 있는지 염려된다.

한자로부터 도래된 단어는 주어진 맥락에서 명사, 형용사, 동사로 쓰이는지 구별이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로부터 생긴 개념적 혼동은 철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불법의 근본인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원래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와 같이 동사를 사용하는 표현이 ‘연기’ 또는 ‘연기법’이라는 명사로 표현돼 마치 이 단어가 지칭하는 특정한 대상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연기법이라는 추상적 대상이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듯 혼동하기도 한다. 한편 ‘공(空)’이란 원래 ‘자성을 결여하다’라는 술어(述語, predicate)로부터 나왔는데 맥락에 따라 명사, 형용사, 동사로 쓰일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공을 명사로 받아들이면서 마치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어떤 근본적인 존재자라고 보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연기와 공이 불법의 근간이다 보니 우리는 ‘연기’와 ‘공’을 명사로 보고 문장의 주어(主語)로 삼아 논한다. 그러면서 연기와 공을 되뇌이다 보니 두 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곤 한다. 용, 유니콘 같은 신화적 동물도 우리가 오랫동안 언급해 왔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대철학은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여러 논리적 장치를 가지고 있다. 수리논리학은 용을 형용사와 동사만을 써 술어로 표현하고 그런 술어가 적용되는 대상이 없다고 보여줌으로써 용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한다. ‘파충류의 몸으로 하늘을 날며 불을 뿜는 존재자가 있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수리논리학으로 기호화하자면 ‘(∃x) (Rx & Lx & Fx)’ [(∃x)(...x...): 최소한 하나의 x가 존재한다, R: 파충류이다, L: 난다, F: 불을 뿜는다]이다. 이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 주는 x의 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연기법은 ‘(∀x) (Ax & Lx & Cx)’ [(∀x)(...x...): 모든 x, A: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L: (조건에 의해) 지속한다, C: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로 표현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이 x의 값을 충족하므로 이 문장은 참이다. 즉 연기법은 참이다. 이렇게 풀어진 문장을 보면 명사는 존재하지 않고 술어만으로 되어 있다. 연기법이 실재하는 특정 대상이 아니라는 증거다. 

공도 마찬가지다. ‘만물은 자성을 결여한다’ 또는 ‘자성을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가 공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x) (~Sx) [S: 자성을 가지다, ~: 아니다]’ 또는 ‘~(∃x) (Sx)’로 표현된다. 모두 참이다. 즉 공의 가르침은 참이다. 그런데 이 두 문장도 명사 없이 술어만으로 되어 있다. ‘공’에 대응하는 대상이 없다는 증거다.

술어의 명사화가 우리를 실체화와 실재화로 유도한다. 하지만 불자라면 마땅히 이런 오류를 경계해야 하겠다. 나는 연기와 공뿐만 아니라 보리심, 자비, 깨달음, 열반 등에 관련된 논의도 원래는 술어적인 표현으로 된 가르침이 명사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명사적이지 않다. 술어적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85호 / 2021년 5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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