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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연재를 마치며 (끝)

개념 분명치 않으면 ‘논리의 칼’ 들이대기도

서양 철학 소개하고자 시작해 대중 요구로 불교 철학 논의 
‘논리를 초월한 진리’ 따로 없어…궁색한 자기위안 불과해
본래 전공으로 돌아가 정진한 후, 대중 위한 교양 글 쓸 것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지난 두 해 동안 격주로 연재해 온 ‘철학하는 삶’의 마지막 글을 올린다. 내가 24년째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는 조교수나 부교수는 물론 정교수도 자신의 강의 및 연구 실적 등을 2년마다 약식 보고서로 그리고 4년마다는 A4 용지로 수백 내지 수천 쪽에 달하는 정식 보고서로 제출한다. 제출된 보고서는 학과의 모든 교수가 읽고 함께 토론하고 심사하며, 학장과의 면담과 심사가 뒤따른다. 이렇게 24년을 지내다보니 습관이 들어 이번 법보신문 연재도 뒤돌아보며 보고서를 작성해 보게 되었다.

이 연재는 불교계에 서양철학의 통찰과 방법론을 소개하고 논의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가르치다보니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경험이 쌓여 시도한 프로젝트였다. 연재를 시작할 때 큰 주제의 틀은 잡았지만 상세한 계획까지 세워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법보신문과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 등을 통해 독자들이 순수한 서양철학의 논의보다는 불교와 더 밀접하게 관련된 글을 원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주제를 서양철학 논의로부터 서양철학의 방법론과 통찰을 이용한 불교철학 논의로 점차 바꾸어 나갔다.

서양철학 관련 연재는 주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현대철학으로 되어 있다. 그 이전 철학은 다른 분들을 통해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아직 불교계에 덜 알려진 분야의 최근 논의를 선택했다. 철학에도 실은 ‘첨단’ 연구 분야가 있어서 그쪽 주제로 논의를 이끌었다. 한 번에 원고지 15매라는 작은 공간에 철학의 주요 주제 하나를 다루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차츰 적응해 왔던 것 같다. 대다수 독자에게 생소했을 언어철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의 주제를 다루었고, 더 나아가 과학철학 일반과 생명과학철학의 주제도 논의했다.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서양철학의 주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 방법론을 이용해 불교철학의 문제를 논의한 글도 많았다. 방법론 자체에 대한 고찰도 잊지 않았다. 특히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 개념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논리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판단되는 곳에서는 가차 없이 논리의 칼을 들이대곤 했다. 흔히 불교는 ‘논리를 초월한 진리’를 가르친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런 입장이 궁색한 자기위안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제대로 된 논리적 훈련을 하지 않아 한 번도 ‘논리의 수준’에 도달해 보지도 못한 사람은 ‘초(超)논리의 진리’를 운운할 자격이 없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나는 자아, 혼, 인격체, 나의 경계선, 같다와 다르다, 지식과 진리, 실재와 존재, 지식과 지혜, 사유, 언어, 논리, 그리고 돈오 등을 개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불교철학 고유의 주제도 물론 논의했다. 무아, 연기, 자성, 공, 중도, 상, 환(幻), 자비, 정토, 대자유, 부정(否定)의 방법, 불성 등 내가 평소 관심 가졌던 이론적 문제 여럿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론철학이 전공인 탓에 주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게 되다보니 우리의 실천과 관련된 자비와 정토세계에 관한 논의는 최근 몇 편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이 점이 아쉬운데, 독자들은 이론철학의 논의보다는 수행과 자비실천과 관련된 글을 더 원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불교적 실천과 관련된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 그쪽으로 연구의 방향을 덜 틀었을 뿐이다.

나는 생각과 실력이 넘쳐흐를 때만 글을 쓰고 발표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학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억지로 쥐어짜서 글을 만들어 출판하며 사는 인생은 바람직하지도 또 재미도 없다. 나는 우리가 어떤 분야를 전공으로 치열하게 연구하고 논문 등을 발표하며 그 분야 지식의 곳간이 가득찬 다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때 보다 넓은 독자층을 위한 글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겨우 끼어 맞추듯이 만든 글을 세상에 내어 교양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양심 없는 행위다.

나는 현대 서양철학이 전공이어서 미국에서 영어로 된 불교철학 관련 서적을 호기심으로 읽으며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했다. 그래서 교양대중을 상대로 한 불교 관련 글을 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불교철학 연구논문을 미국 학회에서 몇 번 발표하고 학술지에 몇 편 게재했을 무렵인 2016년 봄, 한국불교계에서 진행된 깨달음 논쟁에 얼떨결에 참가하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신문과 잡지 등에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논쟁과 관련하여 4개월 동안 평균 원고지 80매의 글 8편을 발표했다.

이런 전력 때문에 불교계 신문과 잡지에 계속 글을 내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의 글을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들께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는 내가 원래 생각하던 대로의 학문하는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다. 내년부터는 격월로 짧은 글을 발표하는 것 외에는 주로 진지한 연구 논문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앞으로 이렇게 10년 정도 정진한 다음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가 되어 내게 넘쳐흐르는 무엇이 있다고 느끼게 되면, 그때 다시 교양대중을 상대로 한 글을 새로 시작해 볼까 한다. 이 모두 내가 불교철학 공부를 너무 늦게 또 독학으로 시작한 탓이다.

불교철학 연구는 너무도 진지한 도전거리다. 현대 학문 분야는 점점 더 전문화되고 있어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불교철학 연구를 진행하려면 불교학과 철학을 모두 심도 있게 공부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이 너무 짧고 한 머리가 너무 작다. 그래서인지 현대 서양분석철학이 전공인 내게는 불교철학 권위자들의 논문도 철학적으로 어설픈 점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불교학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논문의 불교학적 측면도 마찬가지로 부족해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보완하고 해결하려면 관심을 가진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함께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서로 가르쳐주고, 자극도 주고받고, 연구방법을 제시해주고, 또 논문과 책을 함께 집필하며 여럿이 한 주제로 논문집도 만드는 멋진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실은 나는 이런 목표를 향한 초기 작업에 이미 착수했다. 마음 맞는 유능한 불교학자 몇 분이 나와 함께 연구해 주실 의향을 밝히셨기 때문이다.

연재를 마치며 그 동안의 성원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614호 / 2021년 12월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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