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불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8. 불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 홍창성 교수
  • 승인 2020.04.07 10:23
  • 호수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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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소승 존재 않고 존재해 본 적도 없어

불자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 산출방식으로 행위해야
공리주의 견해와 칸트 법칙주의적 관점서도 타당한 도덕명령
‘나만의 깨달음과 열반’은 불자 이끄는 도덕법칙으로 부적절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누구나 가끔씩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질문은 간단히 답하기 어려워 우리는 쉽게 생각을 그만두곤 한다. 불자들이라면 질문의 크기를 좀 줄여서 ‘불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바꾸어 접근하면 그래도 손에 잡힐 정도의 주제로 만들 수 있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하며 살 것인가’로 범위를 더 좁힌다면 원래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이 구름 잡는 듯하던 질문이 이제는 ‘불자로서 어떻게 행위하며 살 것인가’라는 모양 잡힌 질문으로 바뀐다. 

‘어떻게 행위하며 살 것인가’라는 물음도 그 의미를 더 분석해 보면 실은 ‘무엇을 행위의 원칙 또는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라는 뜻의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도 더 깊이 파 보면, 사회 안에서 존재하며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위하며 사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물음은 ‘무엇을 도덕행위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가’이다. 혼자 산다면 도덕이 필요 없겠지만, 두 사람만 모여도 서로의 행위를 규제하고 이끄는 규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가에는 출재가자가 지켜야 할 많고 적은 수의 계율이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 승단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탱해 온 근본적인 바탕이 계율의 수지라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철학은 계율의 구체적인 내용을 넘어 그런 계율 하나하나를 이치에 맞는 계율이게끔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원리에 더 관심을 가진다. 나는 서양윤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칸트의 법칙주의와 밀의 공리주의가 불자들이 따라야 할 도덕규범을 정립하고 또 정당화해 주는 두 원천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모든 도덕률을 도덕률이게끔 하는 원칙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는데, 그의 유명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이 이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여기서 ‘정언’이란 ‘가언(假言)’에 대비되는 논리학의 용어로, ‘무조건적’이라는 뜻이다. 토를 달지 말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명령이라는 뜻이다. 그의 첫째 정언명령은 ‘어떤 법칙이 도덕법칙이려면 그것은 인류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치에 맞는 통찰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일부 집단에만 적용되는 규범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고, 모두에게 보편화될 수 있어야 도덕법칙이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자비를 베풀라’ ‘약한 자를 도우라’와 같이 도덕법칙은 모두 전 인류가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이웃종교의 건물이 무너지도록 기도하라’ ‘이교도를 살해하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증오하라’ 등은 이성을 가진 합리적인 존재자라면 결코 보편화 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종교인이 서로 다른 종교인을 살해해야 한다면 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를 헤아려 보면 ‘이교도를 살해하라’는 명령은 보편화 가능한 도덕명령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보편화 가능성은 도덕법칙의 형식요건에 관한 것인데, 둘째 정언명령은 도덕법칙이 갖추어야 할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인격체여서 이성적이고 스스로 의사결정하며 자율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행위자이기 때문에 존중되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모든 도덕법칙이 충족해야 할 최소한의 내용적 요구사항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통찰이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불교는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가 이 세계의 모든 중생을 자비로 대하며 고통에서 구제해야 할 법계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의 도덕행위가 적용되는 외연이 칸트의 철학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다. 

칸트가 살았던 프로이센의 철(鐵)의 군인처럼 정언명령과 도덕법칙을 숭고한 의무감으로 따르라는 법칙주의에 비해, 상업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비즈니스 마인드에 충만했던 영국의 벤덤과 밀(Mill)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공리주의를 전개한다. 이들은 행복이란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부재(不在)라고 솔직히 인정한다. 영국 정부에서 공공정책을 수립하는 실무를 맡았던 벤덤은 정부의 모든 정책은 왕실이나 귀족, 권력자 또는 부자 같은 소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치에 잘 맞는다고 보이는 공리주의도 당시에는 대단히 과격한 발상으로 여겨져 많은 저항에 부딪힌다. 특히 공리주의가 ‘쾌락’을 언급하기 때문에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윤리’라고 비난받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공리주의의 후계자 밀은 중요한 것은 물질적 쾌락의 양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의 질이라고 주장하며 공리주의를 좀 더 세련된 도덕철학으로 완성해 나간다. 그동안 윤리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이론적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공리주의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상식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불교는 공리주의자가 말하는 행복조차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가르침을 준다. 쾌락과 행복 또한 집착할 상(相)이 되어 우리 고뇌의 원인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이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야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뇌와 고뇌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열반이고, 이 열반이 모든 불자가 향해야 할 대자유의 경지다. 물론 이런 경지로서의 열반이라는 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진정한 열반이라는 재미있는 논리적 이야기도 있다. 

모든 불자가 ‘나만의 열반을 위해 수행하라’는 행위의 법칙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무도 다른 이에게 불법을 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불법이 곧 사라져 아무 불자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불자라면 이런 법칙이 보편화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불자라면 모든 중생이 깨달아 열반에 이르러 고통에서 벗어날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또 그렇게 존중해야 할 텐데, 중생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야 할 불자가 자신만의 열반을 위해 수행한다면 중생에 대한 이런 존중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만의 깨달음과 열반을 위해 수행하라’는 결코 불자의 행위를 이끄는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지난 수년 동안 제시해 온 ‘불자는 최대다수 중생의 최고 깨달음과 열반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법칙이 단지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만 옳은 것이 아니라 칸트의 법칙주의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도덕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는 소승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 본 적도 없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32호 / 2020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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