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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교연구의 한계와 극복

비교연구는 ‘닮았다’ 넘어 융합으로 승화돼야

불교와 물리학 양립 가능하다는 연구는 호기심 충족 수준
서양 철학과 불교가 잘 통한다고 해서 불교 빛나지 않아
한 이론이 다른 이론 더 잘 이해하고 도움 줘야 가치 있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유학생 시절 헝가리에서 온 유태인 학생 하나가 같은 대학원 철학과에 있었다. 유태인 가운데서도 가장 똑똑하다는 아슈케나지 계통의 정통 유대교 신자였다.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만사에 적극적이었고, 동구권 출신답게 다른 미국 학생들보다 수학과 논리학을 잘 했다. 그런데 논리학만 잘해 철학의 모든 주제를 논리학으로만 접근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학기에 영국인 교수가 데카르트의 ‘명상’을 세미나로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학생이 느닷없이 ‘데카르트는 논리학의 모순율을 바탕으로 그의 책을 쓰고 철학체계를 완성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데카르트의 주요 논점 하나하나를 모순율을 적용해 해석해 보였다. 논리학에서 모순율이란 ‘어떤 명제 p는 p 아닌 것이 아니다’ 또는 ‘어떤 명제 p와 p의 반대가 모두 참일 수는 없다’로 표현되는 우리의 사고(思考) 및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모순율은 너무 당연한 공리(公理)여서 논리적 반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학생은 며칠 후에는 모순율뿐만 아니라 ‘어떤 명제 p가 참이면 p는 참이다’라는 동일률도 데카르트 철학의 근간이라고 덧붙이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를 비롯해 다른 아무 학생도 위의 논점을 어찌 할 줄 몰랐는데, 한국에서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인 이명현 선생님을 은사로 모시고 잘 배운 내게는 그 허점이 쉽게 보였다. 그래서 이럴 경우에 은사께서 쓰실 법한 반박 논점을 제시해 보았다:

(1) 모순율이 데카르트의 철학과 양립가능하다는(compatible) 것인가? 아니면, 
(2) 모순율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인가?

위 두 선택지 외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먼저, (1) 모순율이 누군가의 철학과 양립가능하다는 점은 정말 하나마나한(trivial) 소리다. 우리 사고와 언어의 기본 법칙을 지키지 않는 철학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이 법칙을 따르지 않는 일상대화, 사고내용, 철학, 과학은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철학이 이 법칙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아무 새로운 이야기도 해 주지 않는다. 한편, (2) 만약 모순율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이라면, 우리는 모순율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만 해도 데카르트의 철학을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2)는 틀린 주장이다. 결국 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거나 아니면 학문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는 아주 사소한 지적일 뿐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논의는 담당 교수가 나와 전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우리는 역사상 스탈린이 소련의 학자들을 동원해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이 소립자물리학과 닮았다고 증명하게 하고, 그것을 이용해 공산주의가 물리학만큼 과학적이고 위대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업은 헛된 수고였다. 스탈린과 그의 어용학자들이 보여주려 한 것이 (1)유물변증법이 소립자물리학과 양립가능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2)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가? (2)는 거짓임이 분명하고, (1)은 하나마나 한 소리다. 소립자물리학과 양립가능한 이론은 도교와 불교를 비롯해 무수히 많기 때문에, 유물변증법이 물리학과 양립가능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달리 전해주는 쓸모 있는 정보내용은 없다. 지적(知的)으로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 아무런 생산적인 연구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실망스럽게도 영미권(英美圈)의 주류를 이루는 철학자들은 동양철학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 동양계 철학자들이 동서양철학을 비교연구하면서 ‘동양철학도 서양철학만큼 훌륭하다’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노력에 무심하다. 한번은 미국철학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의 윤리학을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한 중국인 학자에게 미국인 학자가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가 비슷하게 보이기 마련’이라며 비꼬듯이 논평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정교한 논리와 분석을 바탕으로 철학을 전개하지 않고, 겨우 두루뭉술하게 닮았다는 식의 요점을 말하는 논문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비판이었다. 내 논점으로 비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의 윤리학이 양립가능하다는 주장은 학문적으로 새로 보여주는 정보내용이 없다.

지금까지 여러 에피소드를 소개한 이유는 현재 한국의 철학계 및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비교연구의 학문성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적 검토를 진행해 보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가르침이 물리학 이론이나 인공지능 연구와 단지 양립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즐겁게 해 준다는 점을 제외하면, 학문적으로 이룩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물리학이나 인공지능연구와 논리적으로 양립가능한 이론은 불교 말고도 한없이 많다. 한편, 서양의 어떤 철학이론과 불교교리가 잘 통한다고 해서 그 점이 불교의 가르침에 광채를 더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 철학이론과 통하는 무수히 많은 다른 이론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연구가 융합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비교가 가능하고 닮았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한 이론 A가 다른 이론 B를 더 잘 이해하고 또 B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두 이론의 비교연구가 가치가 있다. 물론 B 또한 A를 이론적으로 더 세련되게 만들고 A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 유용하다면 더욱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의 연구는 실은 비교를 넘어 융합으로 들어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나는 이것이 모든 비교연구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예를 하나 들자면, 생명과학은 역사상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와 목적론을 바탕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생명과학이 직면한 여러 이론적 문제들을 불교의 공(空)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는 비(非)본질주의와 연기법이 새로이 조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실제로도 생명과학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편, 생명과학의 진화론은 역사상 불교의 가르침이 시대와 새로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며 ‘진화’해 왔는가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비교를 넘어 융합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인데,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도와 서로를 더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는 비교연구가 될 것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36호 / 2020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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