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만난 큰스님]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부처님오신날 만난 큰스님]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05.30 16:59
  • 호수 154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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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려 총림 들어온 대중은 모두가 도반이라!”

절에서 학교 다니며
경전·선어록 ‘탐독’ 

구산 스님 시봉하며
정진원력 토대 다져

허기 속 월명암 정진
천혜비경 감상은 ‘특권’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1년 순례여정서 ‘하심’

​​​​​​​주지 때 중창·보수에 심혈
작은 ‘목우정’ 남다른 애정 
인도,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을 1년 동안 순례한 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은 “출세간에 머물고 있는 스님이라도 한 번쯤 세간에 자신을 던져보는 결단을 내려볼만 하다”고 전했다.사진=안홍범 작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 아래에 살던 청년은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왕 방 하나 얻어야 한다면 조용한 공간이 좋을 듯해 비봉산 아래의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법당에 들어가 ‘절에는 무슨 책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였는데 한 문장에 눈길이 꽂혔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글귀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으며 축적한 내공이 있었던 터라 한자로 된 원문을 단박에 읽어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 온 세계를 머금는다.’

방대한 ‘화엄경’을 7언30구로 농축시킨 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는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티끌 한 점이 우주를 머금는다니. 이 세상 소리가 아니다!’

학교에서 보아야 할 책들은 청년의 마음에서 썰물처럼 나갔고 그 자리에 경전과 선어록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1968년 겨울 범어사 불교대학생수련대회에서  선지가 출중했던 홍봉희(洪鳳喜) 노거사의 선어록 강의가 있다는 전언에 단숨에 달려갔다. ‘지극한 진리(깨달음)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려서 택하지만 말라(至道無難 唯嫌揀擇)’는 신심명 강의와 ‘공부(수행)는 거문고 줄 고르듯 하라’는 명언이 담긴 ‘선가귀감’을 그때 처음 새겨 보았다.

우주선 아폴로가 달에 착륙했다는 소식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던 해(1969) 열린 ‘해인사 대학생불교연합회 여름수련회’에 참석해서는 불교와 과학의 세계를 넘나들며 법문하는 성철 스님에게 푹 빠졌다. 진주 총림선원에 머무를 때는 절의 농사도 지어주며 학교를 다녔는데 그 즈음엔 벌써 ‘무(無)’자 화두를 들고 있었다. 

군 제대 직후 조계산 송광사 산문으로 들어섰다.(1974)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꽂았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청년을 품었다. 세간과 출세간을 잇는 능허교를 건넜다.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첫 발을 딛었음이다. 처음 안긴 절이었으나 푸근했다. 9월이 빚어낸 산색과 숲이 내어 보이는 소리들도 마냥 좋았다. 절밥도 참 맛있었다. 아주 오래 전, 청년의 증조할아버지는 집터를 닦을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먼 훗날, 이 집에서 스님이 나올 것이다!”

은사 인연은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과 맺어졌다.(1974) 법명은 현봉(玄鋒).

담낭국사가 맑은 샘물을 마시고 3일 만에 깨달았다고 하는 ‘영천(靈泉)’을 품은 삼일암(三一庵). 사진=안홍범 작가

조계산 연산봉 아래에는 인월정사(印月精舍)가 있었다. 제방에서 찾아오는 납자들 제접에 심혈을 기울였던 구산 스님이 큰 절의 여러 일들을 잠시나마 젖혀두고 용맹정진 하려 지은 작은 초막 토굴이다.(1975) 현봉 스님은 그곳에서 은사 스님을 시봉하며 동안거 한 철을 보냈다.(1977) 

인월정사 주변 산등성이에는 유독 싸리가 많았다. 낫 하나 들고 싹둑싹둑 베어서는 칡넝쿨로 묶어내면 ‘싸리비’ 한 자루 툭 떨어진다. 얼마나 열심히 엮었는지 인월정사 찾아온 스님 편마다 큰 절로 내려 보낼 정도였다. 지게를 지고 산등성이로 향해 몇 걸음 떼었는데 구산 스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공부하는 수좌가 일에만 빠지면 일꾼이야!” 

토굴 생활임에도 언제나 빈틈없이 철저한 용맹정진으로 일관한 은사스님은 공부인이 ‘하루 3시간 이상 잠자면 안 된다’고 했다. 매일 밤12시가 되면 샘에 가서 자정수(子正水)를 떠와 은사 스님께 올릴 정도로 극진히 모셨다. 한 철 시봉하며 직간접적으로 체득한 게 있었을 터다.

은사스님의 품을 떠난 현봉 스님의 발길은 전북 부안 변산의 월명암(月明庵)에 닿았다.(1978) 그 때 주지라는 스님은 풍수노릇 하느라 절에 붙어있지 않아서 늘 혼자 호젓이 지낼 수 있어 좋았다. 

장독을 열어보니 모두가 텅 비어있었고 한 독에 새까만 소금 몇 줌이 바닥에 딴딴하게 굳어 있었는데 두어 바가지 물을 끓여 식혔다가 부으니 장맛이 났다. 작년 가을 졸업여행을 온 초등학생들이 숙식비로 낸 쌀을 모아두었던 곳간은 벌레들로 우글거렸다.  바랑에 담아온 상추씨를 뿌렸지만 날이 하도 가물어 싹도 나지 않았다.  

월명암에서 1시간 정도 능선을 타고 분초대와 망포대를 지나면 신선대에 닿는다. 그곳에는 상투 틀고 댕기머리에 흰 옷을 입은 채 조선시대의 유교적 생활습관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훗날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간 그 사람들이다. 그들로부터 쌀과 된장 등을 얻어와 허기를 달래곤 했다.

낙조대에서 서해 바다로 퐁당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풍경이 절경인 서해낙조(西海落照)와 골짜기에 운해가 낀 밤하늘에 둥실 떠오르는 달을 월명암 법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월명무애(月明霧靄)는 ‘변산8경’으로 손꼽힌다. 천혜의 자연이 빚어내는 풍광 속에 마음껏 젖어 보는 건 암자에서 정진하는 수좌만이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호사’일 것이다. 낙조대에 올라 가부좌 틀고 앉아 서해의 붉은 노을이 잦아들고 달빛 아래 밤이슬에 옷이 축축해지면 일어섰다. 

울력후 잠시 상념에 든 현봉 스님. 사진=안홍범 작가

서해를 바라보던 시선은 깨달음의 땅 서역의 천축에 닿아 있었다.  

네팔 카투만두의 헌 책방에서 구한 세계여행 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한 권 들고 부처님 8대 성지와 힌두교, 시크교, 무슬림 성지들까지 돌아보고는 파키스탄 땅을 밟았다.(1989)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의 부처님 고행상을 친견하고 간다라 지역과 스와트 계곡을 넘어 길기트를 지나 카라코람의 벼랑길을 떠돌 때는 모래바람은 매섭고 눈보라도 혹독한 겨울이었다. 인더스 계곡의 세찬 물살을 지나면 절벽이 서 있었다. ‘새도 날아오르다 깎아지른 절벽에 놀라고, 사람은 좁은 외나무다리를 건너기도 어렵다’는 혜초 스님의 시구가 스쳐갔다. 이런 길들로 부처님의 경전이 실려 전해졌으니 옛날의 구법승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인도 반다라에서 뜻밖에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기도 했고 많은 성자들도 만나는 기회들이 있었다.

내친 김에 인도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의 곳곳을 떠돌다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와 이스라엘, 터키를 둘러보고 다시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총성이 울리고 있던 캐시미르를 지나 라닥의 고원을 순례하다가 스리랑카 등의 동남아시아 성지들까지 둘러보았다. 

그렇게 홀로 보낸 1년의 여정은 흩어진(逸) 흔적(痕)을 모아 세납 일흔에 선보인 ‘일흔집(逸痕集)’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외로운 행성처럼 홀로 떠돌다 숙소나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다음 여정을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에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편지들이다.

다르질링에서는 칸첸중가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을 마시며 지인에게 감회를 적어 보내기도 했다.

‘천축 땅 머나먼 길 다 밟고 나서/ 구름 밖의 다락 위에 한가히 앉아/ 맑은 차 한 잔을 손에 잡으니/ 설산의 그림자가 거기 떠 있네.’(踏盡五天竺 閒坐雲外樓 手執一碗茶 其中雪山浮)
순례 길 끝에서 마주한 것이 무엇이든 가행정진의 원동력이 되었을 터다.

송광사 제2국사인 진각혜심 스님이 ‘선문염송집’을 편찬했던 송광사 광원암(廣遠庵)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쇠락했고 도량에는 진각국사의 부도인 원조탑(圓照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35년의 폐허 위에 다시 보전을 다시 짓고 향을 사루며 경쇠를 올릴 수 있도록 복원한 장본인이 현봉 스님이다. 

주지(2001∼2004) 소임을 볼 때는 큰방에만 140여명의 스님들이 발우를 펼 정도로 송광사는 융성했다. 그 많은 대중이 운집해 있었지만 작은 불화 하나 불거지지 않았던 건 현봉 스님의 넒은 품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다. 송광사만의 참신한 문화행사도 많이 펼쳤는데 ‘조선사발 특별전’, 나왕케촉과 함께 한 산사음악회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아울러 수석정, 임경당, 해청당, 척주당, 우화각, 능허교 등을 중창·보수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놀라운 건 중수 때마다 중수·상량기 등을 직접 지었다는 사실인데 ‘일흔집’에 수록된 것만도 18개다. 현봉 스님이 복원한 목우정에는 남다른 정성과 사연이 깃들어 있어 이채롭다.

출가 전 진주에서 학교 다닐 때 비봉산 의곡사를 들렸는데 산신각 같은 자그마한 집에 주련이 걸려 있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고(夜有夢者不入/ 입안에 혀가 없는 이가 마땅히 머물러야 한다(口無舌者當住).’

망상이 많거나 말이 많은 사람은 들어오지도 말고 바깥일에 무심하여 시비를 말하지 않는 사람만이 머물러야 한다는 뜻일 터였다. 좀 더 심오한 뜻이 배어 있을 것만 같은데 속 시원히 알 길이 없었다.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주석하던 효봉 스님은 절의 동쪽 계곡에 있는 수석정(水石亭)을 산책하시다가 벼랑 위에 좋은 터 하나를 발견하고는 네 기둥을 세우고 사람 한 명 앉을 만한 초막을 지어 놓고 ‘목우정(牧牛亭)’이라 했다. ‘마음의 소를 길들이는 곳’이란 뜻이다. 그때 효봉 스님의 스승인 석두 스님이 둘러보고는 주련 하나를 써서 걸어 주었다. 

그 당시, 효봉 스님의 사제인 석정 스님도 그 글귀가 좋아 마음에 새겨두었는데 진주 의곡사 주지로 부임하여 그 주련을 써 작은 전각에 걸었다. 출가 전 현봉 스님이 처음 본 그 주련이다.

주지 소임을 마칠 무렵 목우정을 복원한 현봉 스님은 석정 스님께 그 주련의 글씨를 부탁드렸고, 석정 스님은 흔쾌히 그 글귀를 써서 보냈다. 숙연이 아닐 수 없다.

새 주련을 건 현봉 스님은 눈 쌓인 달밤에 홀로 목우정에 올랐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마음 소를 길들이는 목우정에 올라서(登臨牧牛亭)/ 사방을 둘러보니 막힘이 없구나(四顧無碍屛)./ 허공으로 노끈 꼬아 고삐 삼으니(虛空爲繩頭)/ 대천세계 그대로가 하나의 콧구멍(大千悉鼻坑)/ 밤 깊으니 달빛은 더욱더 밝아져(夜深月逾白/ 눈 쌓인 둥지 속에 학의 꿈도 맑아지고(雪巢夢也淸)/ 흐르는 시냇물이 장광설을 토하니(溪吐長廣舌)/ 가지 끝에 부는 바람 울면서 화답하네(枝風共和鳴).’

2019년 11월 조계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현봉 스님은 현재 삼일암에 주석하고 있다. 

 

“사람과 자연의 인과율 돌아보며 뭇 생명과 공생해야”

 

‘송광사 법유’의 원천
삼일암의 영천 복원

대전요통 ‘반야심경’
명료한 선지로 번역

라호르 ‘석가모니 고행상’
불퇴전 비장함에 큰 감동

세간 한복판에 자신 던져
지혜·정진 검증해 볼 만해

고정관념 깨트린 코로나19
미래문명 앞당기는 전환점 

‘정견’은 사람의 품격이자 
지혜·공덕 쌓게 하는 토대

 

조계총림 방장 현봉 스님은 “방장은 방장의 일이, 행자는 행자의 일이 있을 뿐”이라며 “그 누구든 모두가 수처작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장의 역할”이라고 했다.사진=안홍범 작가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9대 담낭국사는 맑은 샘물을 마시고 3일 만에 깨달았다고 한다. 하여  그 샘물을 ‘영천(靈泉)’, 그 옆에 자리한 암자를 삼일암(三日庵)이라 한다. 시와 글씨, 그림에 능했던 염재 송태회(1872∼1942)가 송광사 팔경을 전하면서 ‘삼일영천’을 노래한 시 한 수는 음미해봄직하다. 

‘삼일영천 샘물이 아홉 꽃잎 피우더니(三日水開九葉花)/ 지금은 거울처럼 달과 구름 비추었네(至今雲月鏡中斜)./ 묻노니 사람 일도 어찌하면 그리 될까?(問渠那得關人事)/ 모든 것을 텅 비우면 누구나가 그러하리(只管空靈在自家).’

영천은 그 언젠가 폐정됐다. 방장으로 추대된 직후인 지난해 11월부터 삼일암에 주석한 현봉 스님은 그 물길을 찾아 나섰고, 결국 지난 양력 4월8일 삼일암 뒤의 축대를 헐어낸 자리에서 수원을 찾아내어 물길을 가두고 30여년 만에 다시 샘물을 살려냈다. 올해 봉행한 ‘송광사 16국사 다례재’ 때 하루 밤을 재워둔 영천의 물로 차를 우려내어 올렸다. 

“예전에는 이 삼일영천의 물이 연결된 대나무 홈통을 통해 각 처소의 수각으로 흘러갔습니다. 불단에 올리는 청정수는 물론 약과 차를 달이는데도 쓰였던 송광사의 식수원인 셈입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정혜결사문’이나 ‘계초심학인문’을 쓰실 때나 원감국사께서 원나라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쓸 때에도 이 물로 먹을 갈아 적었을 것입니다.”

영천은 그냥 물이 아니라 “조계의 법유(法乳)”라 강조하는 현봉 스님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현봉 스님은 중국 송나라 대전요통 스님이 지은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을 번역해 ‘선에서 본 반야심경’(불일출판사·1988)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반야심경에 대한 교학적 주해서가 아닌 선적 주해서인데 현봉 스님이 번역해 내놓기 전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다. 

“장흥 탐진강가에 있는 용호정에서 팔순이 넘은 유학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이 쌀 한 되 주고 구한 책인데 ‘불서라 이해하기 어려워 궤짝 속에 보관했다가 드리는 것’이니 살펴보라 했습니다. 표지가 닳아지고 몇 자는 좀이 슬긴 했지만 거의 완전했는데 한 눈에 보배임을 직감했습니다. 은사 스님께 보여드렸더니 ‘참으로 희유한 주해서다. 이를 영인하여 널리 법공양 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선에서 본 반야심경’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듬해인 1989년 돌연 바랑 하나 메고 인도로 떠났다.

“성지를 참배하면서 그곳의 풍토와 역사·문화를 엿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실감나게 이해될 것 같아 떠난 길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나의 속 살림도 좀 더 넉넉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현봉 스님은 1년여의 순례여정에서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을 세 번이나 걸음했다. ‘석가모니 고행상’을 친견하고도 또 보고 싶고, 또 그리워서였다.

“뼈와 살가죽만 남아 있는 몸, 패인 눈과 등에 붙은 뱃가죽, 앙상한 뼈 위로 불거진 힘줄. 깨달음을 향한 한 인간의 절실함에 비통함마저 느껴집니다. 그런데 척량골만은 꼿꼿하게 펴고 있습니다. 고행이라는 극한의 정진을 통해 정각에 도달하려는 불퇴전의 의지가 비장하게 표현되어 있는 겁니다. 단지, 못 먹어서 굶은 사람이라면 허리는 숙여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수행으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까지 이르렀지 않았습니까. 고행상을 빚은 장인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지극했기에 위대한 걸작을 창출한 것이라 봅니다.”

인도 여정에서 얻은 건 무엇인지 여쭈니 결과 이전에 ‘과정’에 무게를 두어보자고 했다.

“육바라밀의 실천입니다. 그 중 하나가 보시입니다. 제 앞에 아이들과 어른들 수십여명이 손을 내민 채 무리지어 서있습니다. 주머니 속 돈을 모두 건네는 순간 저는 굶어야 하고, 제가 걸어야 할 길에 오르지 못합니다. ‘내가 돈을 주지 않아도 저 사람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삶을 이어갈 것’ 이라며 외면한 적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차에서 밤을 보내고 먹을거리가 없어 굶기도 예사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스님’이지만 그곳에서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에 있던 자신을 세간에 던져 지혜로운 판단과 흔들림 없는 정진을 한번 검증해 볼만 합니다.”

잡지 ‘월간 송광사’ 2월호에 실린 현봉 스님의 글이 조금은 이해된다. 

‘서로 격식을 차리어 틈이 나고 사이(間)를 벌리며 경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간(世間)이다. (중략) 출세간(出世間)의 대선지식도 세간을 살아가면서 걸림 없이 지내다가 때에 따라 방편으로 격식을 차리기도 한다. 세간이니 출세간이니 하는 어떤 틀에 묶이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상황에 따라 행동하게 되니, 그대로 세간의 모습에 어울리는(世間相常住) 것이다.’

코로나19는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을 한 달 뒤인 ‘윤사월 초파일’로 연기하게 했고, 세계 축제인 연등회마저 취소하게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가급적이면 서로 거리를 두고 불필요한 소비를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구촌 사람들의 활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미세먼지가 줄어들고 대기는 맑아졌습니다. 인도에서는 국가 봉쇄령 발동으로 북부 펀자브주에서 160km 떨어진 히말라야 산맥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기사와 함께 게재된 사진을 보았습니다. 세계 최악의 대기오염에 시달리는 북경이나 뉴델리의 밤하늘에도 별자리가 선명하게 관측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고정관념과 일상을 크게 깬 코로나19 위기는 미래문명을 앞당기는 전환점이 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너와 나, 사람과 자연 사이에 일어나는 연기 관계의 인과율을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대자연의 자원을 아끼며 뭇 생명들이 서로 더불어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월초파일을 맞아 메시지를 청하니 ‘정견’을 전했다.

“팔정도의 첫째인 ‘정견’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바른 견해를 갖지 않으면 사유와 언행에 문제를 일으키고, 나아가 그릇된 삶의 방식에 탐착할 수도 있습니다. 바르게 보는 건 바르게 이해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사성제·연기법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정견이 세워질 것이라 확신 합니다. 정견은 그 사람의 품격을 이루고, 밝은 지혜와 공덕을 쌓게 할 것입니다.”

조계총림 방장으로서의 어떤 점에 무게를 둘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현봉 스님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관계 속의 공동체 운영을 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방장은 방장의 일이, 행자는 행자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든 모두가 수처작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장의 역할입니다. 수행하려 총림에 들어선 대중들은 모두가 도반입니다.” 

삼일암에서 나와 능허교를 건너 세간 땅을 밟았다. 청량한 바람이 옷섶에 들어찰 즈음 고향수가 말없이 마중해 주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봉 스님은

1974년 구산 스님을 은사로 승보종찰 송광사 출가. 수선사, 백련사, 해인사, 통도사 극락암, 봉암사, 월명암, 수도암, 정혜사, 칠불사,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 조계총림 유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송광사 주지,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역임. 2019년 11월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으로 추대됐다. 편역서로 ‘선에서 본 반야심경’, ‘너는 또 다른 나’, ‘운옥재 문집’, ‘밖에서 찾지 말라’, ‘솔바람 차향기’ 등이 있다. 현재 삼일암에 주석하고 있다.  

 

[1540호 / 2020년 6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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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걸 2020-07-09 14:59:06
큰 가름침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성천 문화재단 유인걸 합장

곽재길 2020-07-01 01:30:48
라호르박물관
https://blog.naver.com/lestofilos/221719575851

성림 2020-06-01 11:01:03
방장스님이 기억하시는 1968년 대불련 범어사 동계수련대회에서 신심명을 가르치신 분은 환성(幻惺) 홍봉희(洪鳳喜) 거사님입니다.
당시 백봉 김기추 거사님과 교우하셨던 참으로 선지가 뛰어나신 분으로, 청주에서 대불련 학생들을 지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