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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에 바란다

기자명 윤원철
  • 기고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흐름 꿰뚫는 통찰 독자에 제공을"

〈법보신문〉이 지령 500호에 이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 동안 어려움도 많았겠고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는데, 척박한 여건을 딛고 교계의, 또 나아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신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기까지 이끌고 온 이들과 밀어 준 독자들 모두에게 경하의 말씀을 드린다.

한 때 객원논설위원으로 〈법보신문〉 시평을 격주로 기고한 적이 있었다. 청탁을 받고 첫 글을 실을 때만 해도 〈법보신문〉을 과연 몇 사람이 구독하며 내 글을 누가 꼼꼼히 읽기나 하랴 하고 솔직히 좀 가벼운 심경으로 임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정을 모르는 경솔한 태도였다는 것이 금방 판명되었다. 여기저기서 글 읽었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평소 불교와 인연이 없는 듯해서 〈법보신문〉을 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학교의 선배, 동료 교수들까지도 글 잘 읽었다고 인사를 해서 겸연쩍었고,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반응이 왔다. 경솔하게 가벼운 기분으로 변변치 않은 글을 용감하게 기고했던 것이 여간 캥기는 것이 아니었고 낯이 달아올랐다. 〈법보신문〉이 얼마나 널리 읽힌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다음부터는 없는 재주나마 성심껏 글을 쓰려고 애썼다. 그리고 때론 잘 읽었다는 치하를, 또더 자주 글이 그게 뭐냐는 질책을 받으며 〈법보신문〉의 커다란 위상과 거기에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새록새록 실감할 수 있었다.

언론, 좀더 좁게 말하자면 신문, 방송 등 대중언론매체를 두고 흔히 현대 민주사회의 제4의 권부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표현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며 또 당위성도 있다는 것을 매일 절절하게 실감한다. 언론매체가 그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언론매체를 통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견해를 형성하게 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각자 세상 모든 일들을 다 직접 체험하고 그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견해를 세울 수는 없는 일이고, 언론매체가 뽑아서 전달해주는 정보를 통해서 세상의 일들을 들여다보며, 또한 잡다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언론매체가 피력해주는 견해에 크게 의지하게 마련인 것이다.

언론매체에 대한 원론적인 요청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꼽히곤 하는 덕목이 공정성인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일 것이다. 별일 없이 태평한 동안에는 그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뭔가 특별하고 중요한 상황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견해들이 엇갈릴 때에는 왕왕 언론의 공정성이 큰 문제로 떠오르곤 한다. 지난번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을 둘러싸고 불교계가 분란에 휩싸였던 때가 가장 가까운 한 예이다. 사태가 당장 어떻게 진전될지 오리무중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교계뿐만 아니라 온 사회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 많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불평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냐? 원인은 무엇이며 사태의 속사정은 어떤 구조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름대로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이해를 하고 견해를 다듬어볼 수 있겠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불교계의 언론매체가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들쳐보고 들어보아도, 어느 교계 신문이나 방송도 속 시원히 충분한 정보와 설명을 제공하지 않더라. 오히려 일반 언론매체에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어주더라. 이런 불평을 들으며 뭐라 변명할말이 없었다.

속사정에 더 정통할 교계의 언론매체들이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 언론매체들이 외부적인 시각에서 선택하고 해석해서 전달해주는 이야기만을 통해서 그 사태에 대한 정보를 얻고 견해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불교가 얼마나 멸시되게 되었는가를 단적으로 시사하는 현상을 하나 소개하자. 2~3주쯤 전이었는데, 무슨 일을 하면서 라디오 방송의 뉴스를 한 귀로 듣고 있는데 조계종 사태의 진전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새 총무원장이 선출되고 수습조치가 시작되던 때였는데, 관련 스님들 법명이 간간이 거론되며 보도가 진행되는데 뭔가 귀에 잘 안 들어오는 말이 법명들 뒤에 붙는 것이었다. 그래서두 귀를 기울여서 가만히 들어보니 귀에 설었던 것도 당연하다. `아무개 스님은… '이 아니라 `아무개 승려는 … '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왕에 익숙하게 사용하던 어법을 버리고 귀에 설어 어색한 호칭을 시도하고 싶어 할 만큼 우리 사회에서불교계를 보는 눈이 험악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의 와중에서도 교계의 언론이 제대로 기능을 해주었다면 그나마 이 지경까지 험악해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쉽다.

위기일수록 더욱 냉철하게 공정하고 사태를 꿰뚫는 통찰을 풍부하게 제공해주어야 할 언론이 전혀 그러하지 못하고 함께 지리멸렬했던 이번 고비는 〈법보신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교계 언론매체들이 두고두고 곱씹으며 반성해야 할 일이다. 〈법보신문〉이 그런 정직한 반성을 딛고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서 정확하고 성숙한 정보와 안목을 위해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언론매체로 발전하기를 앙망한다.


윤원철/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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