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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는 묻지 말아야 할 모순된 질문

잘못된 신비감과 심오한 느낌 불러일으키지만 논리적 오류
철학은 논리적 모순을 결과하는 대상은 존재 못한다고 판단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는 점 깨닫는 차원에서만 의미 있어

그림=허재경

“나는 누구인가.”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만한 물음이다. 일상에서는 묻지 않을 질문이지만, 불자는 이 물음이 가지는듯한 어떤 심오한 깊이를 헤아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현대분석철학은 원칙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것 같은 심오한 질문은 실은 개념적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Who am I?”인데,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렸나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Who are you?”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묻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통 “나는 홍길동입니다.”라는 식으로 답한다. 그러나 물론 불교계에서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내가 나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묻고 있는가. 이 질문이 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로 물어야 한다. 그러면 미국인이라면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의 직업이나 직책을 모릅니까?”라는 식으로 한심하다는 듯 되물을 것이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심오함과 신비감은 먼저 “Who am I?”와 “What am I?”를 구분하지 않고 애매하게 섞어 쓴 혼동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애매함의 오류에 해당된다. 한편, “What am I?”라는 질문이 일상에서 말하는 직업이나 직책, 가족에서의 위치 등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떤 종교적·철학적 정체성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질문은 개념을 분명치 않고 모호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논리학자들이 경고하는 모호함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는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한국어와 영어의 “왜 Why”는 인과적인 원인(cause)을 묻기도 하고 또 어떤 목적이나 이유(reason)를 묻기도 한다. 이 물음은 생존의 생물학적 원인과 살아가는 구체적인 목표와 이유를 개념적으로 뒤섞어놓고 질문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오도(誤導)해 이것이 마치 심오하고 신비한 질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지는 더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살펴보자. 존재세계는 나와 나 밖의 다른 모든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적인 세계(the internal world)와 외적인 세계(the external world)가 이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곧 나의 의식세계와 의식 밖의 세계와도 일치한다. 내 의식세계는 1인칭 관점에서만 기술할 수 있고, 오직 나만 접근할 수 있으며, 내가 내성(內省)한 내용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어 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내 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제 1인칭 관점에서 보는 나를 ‘나1’라고 하고 3인칭 관점에서 지칭된 나를 ‘나3’라고 해보자. 나1는 주관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남들이 바라볼 때 객관화된 대상으로서의 나3와는 내 의식에의 접근가능성과 의식내용의 무오류성 측면에서 전적으로 다르다. 나1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과연 내1가 ‘나1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며 나1를 찾아 나1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시키고 탐구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일단 내1가 나1에게로 향할 수 있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어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다. 아무것도 그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는 원리(the principle of non-reflexivity) 때문이다. 칼은 버터를 자를 수 있지만 그 스스로를 향해 서서 스스로를 자를 수는 없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스스로를 가리킬 수 없고, 어머니는 아이를 낳지만 스스로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홍길동은 그 스스로를 향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다. 스스로를 향할 수도 없는데, 향해야만 가능한 사랑도 미움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홍길동이 스스로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의 한 부분, 예를 들어 그의 의지가 그의 다른 부분인 감정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경우일 뿐이다.

위의 원리는 내1가 나1를 향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나1는 나1를 찾을 수 없고 나1에 대해 고민하거나 변화시키려 할 수도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1를 향할 수 없고 없는 내1가 나1에 대해서 물을 수 없다. 한편, 이 질문을 “나3는 누구인가”로 바꾸면 뜻이 통하게 된다. 내1가 나1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내1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3는 누구 또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위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남들이 바라보는 나3는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불교나 철학에서는 이런 질문을 중시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1가 “나1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인데, 이럴 경우 이 물음은 위에서 지적한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질문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백보를 양보해 질문을 “나3는 누구인가”로 해석하더라도, 우리가 한두 걸음만 더 나가보면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다음의 문장들에 주목해 보자.

(1) 내1가 나3이면 내1가 아니다.
(2) 내1가 나3가 아니어야 나1다.

우리가 주관으로서의 나1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위의 (1)과 (2) 두 문장은 모두 참이다. 내1가 객관화되어 내3가 되면 나1로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1와 나3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entity)이라는 점이다. 홍길동이 (또는 그의 의식세계가) 1인칭 관점과 3인칭 관점에서 모두 관찰되고 기술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은 홍길동 하나뿐이다. 관점이 달라진다고 해서 대상의 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관점을 바꿀 때마다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가 거듭 생겨날 것인데, 이것은 망상이다. 그래서 이제 나1와 나3를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대상 X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위의 두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된다.

(1) X가 X이면 X가 아니다. 
(2) X가 X가 아니어야 X다. 

이는 분명한 패러독스로서, 철학은 논리적으로 모순을 결과하는 대상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X, 즉 나1 또는 나3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금 확인하지만, 붓다의 가르침 무아(無我)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논리적 오류 때문에 잘못된 신비감과 심오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지혜롭다면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다. 그러나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 중요한 수행이기 때문에 방편으로 이런 물음을 던진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나 또한 다른 출재가자와 마찬가지로 이런 방편을 소중히 받아들인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42호 / 2020년 6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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