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서울 진관사와 초월 스님
21. 서울 진관사와 초월 스님
  • 임은호 기자
  • 승인 2020.07.07 16:54
  • 호수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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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중 전각에 100년 간 감춰있던 태극기 속 독립운동 투혼

2009년, 서울 진관사 칠성각 보수 중 벽 뒤에서 발견된 태극기
모진 고문 속 독립 의지 꺾지 않은 초월 스님 세상에 공개돼
순국 70년 만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항일지사 기억해야
2009년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된 진관사 칠성각.

2009년 5월26일,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꾸러미 하나가 발견됐다. 스님들이 조심스럽게 꾸러미를 벗기자 천 보자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태극 문양이 비쳤다.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풀어보니 놀랍게도 몹시 낡고 오래된 태극기였다. 귀퉁이는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지는 등 풍상에 많이 삭았지만 분명 태극기였다.

크기는 가로89cm, 세로 70cm,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 덧그려진 태극기였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 넣는 그 간절한 마음이 태극기 속에서 몽글몽글 쏟아져 보는 이들 눈에서는 눈물이 배어나왔다. 마치 혈서 쓰듯이 일장기 위에 그린 태극 문양. 그것은 그대로 독립에 대한 붉은 맹서였다.  이렇게 ‘진관사 태극기’는 어둠을 뚫고 환한 빛의 세계에서 다시 환생했다. 

태극기 안에서 항일 지하신문 인쇄물 10여부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하나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이었다. 1919년 11월27일자 독립신문 1면에는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가 적혀있었다.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二千萬 同胞(이천만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독립신문 4점 외에도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부터 이듬해까지 서울의 독립운동 조직과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간행한 ‘신대한’ 3점, ‘조선독립신문’ 32호 등 5점, ‘자유신종보’ 6점, 민족을 배반하고 부역하는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 등도 함께 있었다. 신문 및 문건 발행 시기는 모두 3‧1운동 이후부터 그해 겨울 사이로 확인됐다. 태극기는 낡았지만 인쇄물들은 마치 인쇄기에서 갓 찍어낸 듯 보관 상태가 좋았다.

학계와 불교계가 후속 조사를 벌인 결과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진관사에서 수행하며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만들고 만해, 용성 스님 같은 불교계 항일인사 등의 활동을 지원했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3‧1독립운동 당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일제에 잡혀갈 때까지 초월 스님은 사리를 보관하듯 태극기에 항일의 상징과도 같은 인쇄물들을 싸서 꽁꽁 숨겨놨던 것이다. 진관사 태극기 발견은 많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진관사가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초월 스님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독립을 향한 당시 민중들의 목숨을 건 활동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일제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초월 스님.

진관사는 6‧25한국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됐다. 그래서 칠성각을 비롯한  일부 전각만이 겨우 보존됐다. 만약 칠성각마저 전쟁으로 불탔다면 독립을 향한 초월 스님의 뜨거웠던 마음은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초월 스님의 원력(願力)과 부처님의 가피가 만들어낸 만든 기적이었다.

초월 스님은 1878년 2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해 해인사에서 경학과정을 마쳤다. 출가 당시 법명은 동조(東照), 초월은 법호다. 스님은 20대 중반에 이미 대강백이라 불렸으며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성인이었다. 28세 때인 1903년에는 영원사 조실에 오를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1915년 불교계 고등교육기관 중앙학림(현 동국대)이 문을 열자 초대 강사로 내정될 만큼 학식이 높았다.

초월 스님은 1921년 마포포교당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일심교(一心敎) 강령을 구상했다. 일심교는 ‘화엄경’에서 얻은 깨달음과 항일운동 전략이 어우러진 결정체로 훗날 비밀결사조직인 일심회(一心會)의 토대가 됐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은 그 중심이었고 전국에서 초월 스님의 뜻에 동조한 동지들이 결속돼 자금 모금이 이루어졌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 보수 현장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  귀퉁이가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있어 몹시 낡았지만 일장기 위에 덧그려져 독립 의지를 담았기에 의미가 더 컸다.

초월 스님은 3‧1운동이 발발했는데도 불교계 독립운동이 미약한 사실을 개탄스러워 했다.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은 진관사를 비롯해 전국 사찰을 돌며 항일 이념인 일심교를 전파했다. 특히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인 스님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는 말로 독립운동에 나설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시 가담하라고 학인들을 일깨웠다. 또 중앙학림 내 한국민단본부를 설치, 상해 임시정부 및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초월 스님은 1919년 단군 건국일 기념 및 1920년 3‧1운동 1주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반복된 체포와 가혹한 고문은 스님의 몸과 마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스님은 출옥 후에도 독립자금 모연 등으로 여러 차례 체포될 위기를 겪었다. 특히 스님이 미치광이 행세로 일제의 감시를 피한 얘기는 유명하다. 동학사 강사 시절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며 참선했고 일제의 순사가 방에 들이닥치면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1920년 승려독립선언서와 의용승군제 추진을 통해 불교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던 스님은 한동안 전국 각지 사찰에서 강의를 이어가며 일제 감시망을 피했다.

진관사 초입부터 사찰까지 약 1km에 조성된 백초월길.

하지만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끝까지 피할 순 없었다. 1938년,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용산역을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군인 및 군수물자 보급지기로 활용했다. 초월 스님은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조선독립만세’ 등의 격문쓰기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스님은 일심회 회원 등 80여명과 일제에 의해 구금됐다. 스님은 1943년 출옥 후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또다시 체포됐다. 그리고 이듬해 1944년 6월29일 끝내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청주교도소에서 입적했다. 스님은 일제에 의해 공동묘지에 매장됐다가 어딘가로 이장됐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스님의 20여년간의 삶은 체포와 투옥, 구금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결국 옥사했다. 그렇게 스님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졌다.

태극기 발견 이후, 진관사는 초입부터 사찰까지 약 1km에 백초월길을 조성했다. 일제강점기 진관사는 지금보다 훨씬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일반인은 쉽게 찾기 어려운 장소였다. 초월 스님은 그 산길을 오르내리며 마음속까지 꺼지지 않는 항일 독립의 불꽃을 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진관사 태극기’ 덕분에 초월 스님의 항일운동이 뒤늦게 재조명됐다. 그리고 순국 70년 만인 2014년에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귀퉁이가 불에 타고 일장기 위에 덧그려진 태극기. 90년 만에 이 태극기가 우리 곁에 온 이유는 불굴의 의지로 지옥 같은 이 땅에 희망을 일깨운 초월 스님의 삶을 잊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당부였을 것이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544호 / 2020년 7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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