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박생광의 ‘열반’ : 종교와 무속의 경계
25. 박생광의 ‘열반’ : 종교와 무속의 경계
  • 주수완
  • 승인 2020.08.03 14:35
  • 호수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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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위해 치열히 살다간 불교인 모습 담아

강렬한 색채로 민족적 화풍 구현했다고 평가 받는 박생광 화백
단순 샤머니즘 아닌 내면에 있는 자연의 힘에 대한 두려움 표현
인간 가장한 심연의 무의식 세계 들어갔다 나온 예술가로 평가
박생광, ‘열반’, 종이에 수묵, 136×137㎝, 1982.(왼쪽) 돈황 막고굴 제158굴 열반상(오른쪽).

강렬한 색채를 구사한 것으로 유명한 내고 박생광(乃古 朴生光, 1904~1985) 화백은 민족적인 색채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잘 알려진 그의 화풍은 사실 그의 말년 6년 정도 동안 급속히 완성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활동했던 그였기에 그의 초·중기 작품은 때로 일본풍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수묵을 이용한 해학적인 그림은 한편으로는 한국의 민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가 1979년부터 한국에 정착하면서 선보인 급작스런 새로운 화풍 역시 그의 생각 속에서는 오랜 기간 숙성된 화풍이었을 것이다.

그는 말년 작품에서 민족적인, 그러면서도 역사적인 그림을 추구하면서 민화, 무속화, 그리고 불교를 소재로 삼았다. 특히 같은 고향 출신으로서 친구였던 청담 대종사의 영향을 받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때 출가한 경험까지 있을 정도로 불교에 관심이 깊었다. 만약 이 분이 출가를 하셨더라면 그래도 화승으로서 계속 그림을 그리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이번 연재에서 다루는 근현대 화가들 중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불교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작가라 하겠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 속 불교는 언뜻 가장 비불교적이다.

그의 색채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인지, 그저 소재로서만 불·보살이 등장할 뿐, 사실상 무속화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전통종교라는 것의 가장 근원은 무속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것은 곧 원시종교에서 이어진 것이고, 불교가 그토록 극복하고자 했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의상대사께서 부석사를 세우실 때 그 자리를 먼저 점거하고 있었던 외도들도 아마 따지고 보면 무속인들과 유사한 성격의 종교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생광의 그림은 오히려 “불교가 전통이었나” 반문하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전통종교라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굳이 기독교를 전통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교가 내세우는 전통을 무속이나 혹은 미신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박생광의 불화들은 필자에게 기묘한 불편함을 준다. 우리가 불교에서 느꼈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보다는 더 명상적이고 내면적인 그런 전통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불교의 무속화가 아니다. 박생광의 작품 안에서는 차라리 행복보다 슬픔, 고요보다 치열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그림이 역사를 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자신도 역사화를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불교그림은 마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이 사회에 굳건히 자리잡게 되기까지 많은 희생을 치렀던 험난한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슬프다. 그림에 묘사되지는 않았어도, 그의 그림 속 붉은 색은 순교자 이차돈의 피처럼 느껴지고, 푸른 색은 태고 보우 스님이 마지막으로 건넜던 제주 바다의 일렁임처럼 불안하다. 노란색은 스러져 가는 단풍마냥 깊은 산사를 지켰던 스님들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종교미술은 늘 초월과 완벽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보살의 우아함과 고상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박생광의 불화는 깨달음을 위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다갔던 스님들과 불자들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그렇게 불교를 이 땅에 뿌리내린 그 분들의 피땀이 곧 한국의 불교사가 되었음을 그의 불화들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종이에 채색, 135×140㎝, 1981.

박생광은 인도 아잔타 석굴을 답사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민족적인 미술의 방향을 불교에서 찾겠다는 결심도 청담 대선사와 아잔타 석굴과의 인연에서 더욱 강하게 굳어졌다고 한다. 그의 ‘열반’은 여기서 더 나아가 혹시 박생광 화백이 돈황 막고굴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하게 한다. 가운데 누워계신 부처님의 모습은 막고굴 158굴의 열반상을 모델로 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의 시대에는 중국과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돈황을 다녀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도록이나 사진을 통해 접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민족적인 색채를 추구했던 그에게 아잔타 석굴에서 더 나아가 막고굴을 직접 접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자신이 얼마나 동양 색채의 전통에 강하게 뿌리를 두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여하간 그의 ‘열반’은 굳이 부처님의 다비식을 표현할 것도 없이 이미 그 자체로서 불타고 있다. 필자가 느꼈던 슬픈 색조들은 이 작품에서 뜨겁게 불타서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다. 대신 전통적인 열반도에 나타나는 슬픔의 모티프는 전혀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원한 ‘고요한 사라짐’ 즉 ‘적멸’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민족 예술의 절정이랄 수 있는 석굴암을 재해석한 그의 또다른 작품 ‘토함산 해돋이’는 본존불과 11면관음, 그리고 금강역사를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재구성하여 마치 석굴암이 우리의 정서 안에서 어떻게 자긍심과 자부심으로 자리잡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한켠에 그려진 닭의 모습은 신라를 상징하는 단어인 ‘계림’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와 닭이 불화를 장대한 불교역사화로 만드는 이런 강력한 힘을 지녔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의 무속적인 색채 불화는 단순히 샤머니즘에 머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샤머니즘이란 우리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초월적 자연과 힘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며 20세기, 이제는 21세기를 지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불교는 참선을 통해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러한 우리의 무의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을 이해하는 길을 제시한다. 마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딥씨 챌린지’ 잠수정을 타고 세상에서 가장 깊다는 1만1000m가 넘는 마리아나 해구에 다녀온 것처럼, 작품 속의 박생광은 불교라는 배를 타고 인간 가장 심연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예술가로 보인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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