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열풍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롭다는 수식어를 달고 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대세라고 할만하다. 또한 그만큼 민화에 대한 이론적 연구도 착실히 다져졌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한다면 민화가 단순히 사대부의 그림을 어설프게 흉내 낸 아마추어의 그림이 아니라 왕실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향유했던 거대한 미술양식이었음을 한국미술사에 각인시켰다는 점이 아닐까. 그래서 민화의 ‘민(民)’은 민간이나 민속이 아니라 우리 민족기층에 깔린 감성을 대표하는 미술로 평가되기에 이른 것이다.불교미술도 마찬가지로 인도,
승가에는 ‘울력’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는 마을사람들이 보수를 받지 않고 힘을 합쳐 어떤 일을 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은 스님들이 사찰에서 농사를 짓는 등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노동하는 스님이라는 이미지는 현대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브라만 같은 인도의 종교 수행자들은 노동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수행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회가 배려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다른 의미도 추가돼
이번에 소개할 작가가 연재의 컨셉에 과연 맞는 분일지 망설여졌는데, ‘불교를 사랑한 예술가들’에서는 불교미술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작가나 화승, 승장은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분들은 별도로 다루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할 분은 스님이다. 그러나 이분이 화승이나 승장이신가 하면 그렇지는 않으므로 무방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고 한다면 예술가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 다루지 않는다면 어차피 그 어떤 주제에서도 이 스님을 다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또 그 어디에도 해당
현대미술로서의 불교미술은 다양한 실험을 하지만, 자칫 그러한 시도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불상이란 매우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불상을 현대적으로 변형하거나 왜곡해서 표현하는 것은 불교적 입장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결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위험한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보여주는 강한 메시지 덕분에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안성금 작가의 ‘부처의 소리’가 그렇다. 이 작품들에서는 불상이 온전히 전시되지 않고 반으로 잘려서 전시된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일 수 있다. 불교미술에서 이처럼 불상을 자르거
불화는 부처님이나 보살, 나한 등을 그린 그림이지만, 불교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부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모습을 통해 부처님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어떤 것인지 등을 설명해주기는 힘들다. 연기, 번뇌, 해탈 등을 만약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선종화는 먹의 추상적인 사용이나 형태에 대한 파격을 통해 우리의 선입견이나 판에 박힌 사고를 깨뜨려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종교 성상은 항상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는 아래에 존재하고, 신은 위에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우리가 이미 부처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셨지만, 누구도 감히 스스로를 부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신 스님도 계시고, 심지어는 실제로 현현한 문수보살의 뺨을 때린 스님들도 계시긴 했지만 그 충격요법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더불어 부처를 둘러싼 보살, 나한, 신장들도 모두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무
조계사 앞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난다. 그 목적은 달라도 조계사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만큼 조계사 앞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공간이다. 조계사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일주문 앞을 정성스레 꾸며놓는다. 그래서 이 앞을 지날 때면 도심 속임에도 계절을 읽을 수 있어 좋다.일주문을 통해 조계사 경내로 들어가다 보면 독특한 철붙이 조각들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사천왕상이다. 그런데 그 사천왕상들은 평소 절에서 보던 사천왕과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원래 사찰 경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이라는 세 개의
지난 연재에서 광배가 불상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후불탱화가 잘못된 법식이라든가, 그것을 앞으로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다. 이 법식 역시 이미 오래돼 전통으로 자리잡았고, 조선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광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런 법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조선시대의 그 아름다운 후불탱화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후불탱화와 광배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해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실상사 후불탱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실상사 약사전에 모
법당의 불상 뒤에 후불탱화가 걸려있다는 것은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불상과 불화가 하나의 세트로 불단 위에 모셔지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다. 이런 법식은 아마 조선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불상 뒤에 바로 불화를 걸면 사실상 불화가 잘 보이지 않음에도 왜 한국에서는 이러한 봉안 법식이 자리잡게 되었을까.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불탱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원래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불상 뒤에는 당연히 광배가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불상은
이번 연재에서는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지금까지 김환기, 장욱진, 백남준 등 쟁쟁한 화가들과 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건너 뛴 채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을 소개하는 순서로 넘어와 버렸다. 이중섭에 대해 쓰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그와 불교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물게 그가 불교와 관련된 작품을 남긴 것이 있음을 알았지만 실제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을 직접 보게 돼
붓다께서는 보드가야 숲에서 새벽녘에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한다. 이 새벽별이라는 것은 산스크리트 경전에서는 ‘아루나’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뜻은 새벽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새벽, 혹은 막 떠오르는 태양으로 인해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의미를 한역경전에서는 샛별, 즉 금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쪽 하늘 샛별을 보며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됐다.그러나 막상 전통불화에서는 별이 묘사된 경우가 없다. ‘월
2020년말 해인사 성보박물관은 대대적인 내부공사를 진행하며 전시실의 가벽을 제거했는데, 안에서 뜻밖에 고 백남준(1932~2006) 선생의 비디오 설치 작품 ‘해인사 판타지’가 발견됐다. 이 작품은 1998년 성보박물관 건립 당시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석철(1943~2016)의 의뢰로 백남준 선생과 프레스코화 전문가인 진영선 교수가 함께 제작했으며, 2001년 완성됐다. 이후 대략 2010년까지 전시됐으나 ‘해인아트프로젝트’ 특별전을 위해 작품 앞에 가벽이 설치된 후 그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결국 10년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동양화가 김선두 화백은 2002년 가나아트에서 열렸던 근현대불교미술전에도 참여했고, 2020년 불교미술인협회 창립전에도 출품하는 등 불교예술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곧바로 불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보통 ‘불교미술’이라면 부처나 보살, 아니면 나한 등이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이런 불교회화의 전통적인 주제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깨달음’ 등 불교적 개념을 표현한 것임을 적극적으로 언급한다. 실제로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작품 안에서
이번 연재는 특별한 전시를 하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2019년 개관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관장 원종현 신부)에서 ‘현대불교미술전: 공(Śūnyat1)’이 열리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처형장이 있던 곳으로서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100여명의 교인이 여기서 처형됐다. 1984년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고, 최근 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조선말 천주교 관련 상설전 외에 다양한 특별전을 열어 열린 문화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이번에는 종교를 넘어 현대불교미술에도 그 공간이 열렸다. 구례 화엄사에서는 1653년 제작된 높이 약
우송 전성우(雨松, 全晟雨, 1934~2018) 화백은 ‘만다라 화가’로 불릴 만큼 만다라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만다라라고 하면 티베트에서 비롯한 기하학적이고 도안적인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에 언뜻 그의 작품은 제목만 만다라일 뿐 그것이 실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교회화의 만다라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만다라(Mandala)’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만달(Mandal)’은 본질을 뜻하고 ‘라(la)’는 소유를 의미해 ‘본질을 취하는 것’ ‘본질을 담아내는 것’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림으로
오윤(吳潤, 1946~1986)은 민중미술, 판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조각가이다. 그가 추구한 민중미술이란 무엇일까? 여기서는 필자 마음대로 불교적인 해석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민중의 중(衆)은 ‘무리’, ‘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도에서 불교교단을 지칭하는 상가(saṃgha)를 발음으로 번역해 승가(僧伽)가 됐고, ‘중’이란 뜻으로 번역했다. 현재 불자들은 스님들을 ‘스님’, ‘승’으로 부르고 ‘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스님들을 무시할 때 ‘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원래 ‘중’에
현대 불교미술의 트랜드라고 한다면 ‘귀욤’이 아닐까. 원래는 동자승을 귀엽게 만든 인형같은 조각상들이 사찰 기념품점이나 혹은 탑 기단 위에 슬그머니 올라가 있더니 점차 부처님까지도 귀엽게 만들어 캐릭터화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불단 위에 모시고 예불드리는 불상은 조선시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시대에 등장한 ‘귀욤’ 양식은 아직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다만 사람들이 불교를 더 친근하게 생각하고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홍보용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불교미술이라고까지 불러야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그러나 앞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성보 문화재로서 불교미술품은 각각의 시대마다 장인들이 그들의 예술정신을 불어넣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은 그러한 문화재 안에 담긴 시대적인 정신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마애불은 인위적인 화폭이나 건축적인 공간 대신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간과 바위에 인간의 정신을 투사하여 조성하는 매우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즉 마애불은 산 속에 넓은 화폭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그 위에 작가가 새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 바위를 보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게
서양화가 전혁림(全爀林, 1916~2010)은 통영에서 태어났다. 1930년 통영수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졸업 후 진남금융조합에 취업하면서 그림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대한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938년 부산미술전람회에서 ‘신화적 해변’ ‘누드’ ‘월광’을 출품해 입선했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는데 주로 일본에서 건너온 당시 세계 화단을 소개한 화집과 책을 보며 연구했다. 잠시 아마추어 일본인 화가로부터 강습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양화가 이만익(李滿益, 1938~2012)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는 많이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그 작품이 바로 이만익의 작품이다. 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나 1946년 가족들이 모두 월남하면서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공부했으며, 중학생이던 1953년에는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하여 입선할 정도였다. 입선시켜놓고 보니 고작 중학생인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국전 출품자의 나이 제한 조항이 신설되었다고 하니 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