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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중섭의 ‘탄생불’ :  탄생불과 성모자

기자명 주수완

아내와 아이 향한 그리움 담아낸 ‘탄생불’

일반적 불화 형식에서 벗어났지만 작가 세심한 의도 엿보여
복숭아는 탄생의 힘과 부처님 탄생으로 치유받는 중생 상징
호류지 벽화 속 관음보살과 유사해…일본 벽화 영향 받은 듯

탄생불, 1950년대, 개인소장. 은지에 새김, 유채. 8.7×15.2㎝.
탄생불, 1950년대, 개인소장. 은지에 새김, 유채. 8.7×15.2㎝.

이번 연재에서는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지금까지 김환기, 장욱진, 백남준 등 쟁쟁한 화가들과 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건너 뛴 채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을 소개하는 순서로 넘어와 버렸다. 이중섭에 대해 쓰지 못했던 것은 아무래도 그와 불교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물게 그가 불교와 관련된 작품을 남긴 것이 있음을 알았지만 실제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이 작품을 직접 보게 돼 비로소 소개해드리고자 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의 주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 속에 전통이 어떻게 녹아들어가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전통과 현대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속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 미술의 전통에서 불교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워낙에 방대한 것이기 때문에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불교적 요소들 역시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중섭의 작품들이 몇 점 전시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그의 ‘탄생불’을 발견했다.

이중섭의 작품 중에는 소를 그린 작품들이 대표적이지만, 그밖에 은박지에 그린 천진무구한 아이들, 혹은 가족들을 소재로 한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친근해 더 정이 간다.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많은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또한 이 그림들의 해학적인 모티프들은 고려청자 등 전통 도자기에 나타난 장식문양에서 비롯됐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시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1940년 조직된 친일 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 대항해 이쾌대의 주도로 1941년 결성된 ‘조선신미술가협회’에 참여하면서 그들이 활동의 사상적 근간으로 삼았던 고유섭과 이여성의 미술사 이론을 받아들인데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고유섭 선생의 미술사 연구에 있어 불교미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매우 컸던 만큼 이중섭 역시 한국의 전통불교미술도 다양하게 접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1940년 동경문화학원 미술과를 졸업하고 제4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 작품이 연필화인 ‘불상’과 유화인 ‘소와 소녀’였다는 것을 봐도 불교적 모티프는 이미 조선신미술가협회 활동 이전부터 그에게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은박지에 마치 만화처럼 그려진 ‘탄생불’은 일반적인 불화의 형식에서는 많이 벗어나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심한 의도들이 엿보인다. 우선 화면 좌측의 아기부처는 아쉽게도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오른손 부분이 잘 보이지 않지만, 땅을 향한 왼손은 손바닥을 펴서 바깥을 향하고 있다. 탄생불 중에는 간혹 왼손을 올리고 오른손을 내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처럼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내리고 있어서 일반적인 도상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바닥을 향한 손도 하늘을 가리키는 손처럼 검지손가락을 세운 경우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와 같이 ‘여원인’처럼 전체를 편 경우도 있다. 

한편 전통적인 도상에서 탄생불은 대부분 허리에만 옷을 두르고 있지만, 역시 아주 드물게 완전한 나신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어서 도상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파격적인 것은 탄생불이 직립한 형태가 아니라 마치 걷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설하시고 일곱 걸음을 걸으신 것을 함께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더불어 탄생불은 보통 목욕을 위해 선반 같은 곳에 올라가 계신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는 복숭아 위에 올라가 계신 모습으로 묘사한 것도 특이하다.

복숭아는 이중섭에게 치유의 힘, 생명의 힘을 지닌 천도복숭아의 의미였다. 그의 친구였던 구상이 병에 걸려 누웠을 때 이중섭이 복숭아 속에 동자가 청개구리와 노는 모습을 그려주면서 “그 왜 무슨 병이든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먹구 얼른 나으라고 요 말씀이지”했다는 이야기에서  작품 속 복숭아의 의미를 읽어볼 수 있다. ‘탄생불’ 속의 복숭아는 생명 탄생의 힘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부처님의 탄생으로 중생들이 치유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중의 관음보살.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중의 관음보살.

한편 맞은편의 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일반적으로는 연꽃을 두 손으로 들고 있지만 여기서는 한 손으로 들고 있어 독특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속의 관음보살이 이처럼 한손으로는 연꽃을 들고, 한손으로는 마치 반가사유상의 오른손처럼 턱에 갖다 댄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 ‘탄생불’의 보살 자세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특히 그 아래 대좌의 모습을 보면 연화대좌가 꽃에 의해 떠받들어진 듯한 모습인데 호류지 벽화 속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대좌와 유사한 점이 보인다. 아마도 일본 유학 중에 호류지 벽화를 직간접으로 접했던 것이 아닐까.

문제는 탄생불과 보살의 이 기묘한 조합이다. 부처의 협시로 보살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만, 탄생불에는 협시보살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천신들이 둘러싼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많다. 이중섭은 왜 이런 구도를 만들었을까. 아마도 보살, 특히 관음보살의 자비가 모성애로 비유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보살은 사실상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왕비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은 불교적인 의미에서의 ‘성모자’ 개념이겠다.

다른 해석도 해볼 수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쪽으로 기운다. 즉, 작품 속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이라는, 사실상 이 그림 속 아이와 보살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늘 그리워했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그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종이에 유채, 41.8×30.5㎝.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종이에 유채, 41.8×30.5㎝.

이처럼 그가 가족들을 불교적 모티프에 비유하여 표현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그의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는 자연스럽게 원효와 혜공 스님이 물고기를 먹고 강가에서 배설한 뒤에 그것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라고 농담했다는 삼국유사의 ‘이혜동진(二惠同塵)’을 연상시킨다. 정말로 그의 눈에는 모두가 부처요, 보살로 보였는가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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