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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진경화가 김천일 : 마애불에 담긴 정신을 추출하다

기자명 주수완

바위에 담긴 정신 이 시대에 도로 꺼내 재해석

진경산수화 속 마애불은 풍광의 일부에 머문 것 아닌 주인공
초상화 같은 그림으로 조각가가 발견한 부처의 이데아 탐구
실제와 같은 듯 다른 마애불서 진경의 의미와 깊이 느껴져

김천일,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2019.
실제의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는 성보 문화재로서 불교미술품은 각각의 시대마다 장인들이 그들의 예술정신을 불어넣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미술사학자들은 그러한 문화재 안에 담긴 시대적인 정신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중에서도 마애불은 인위적인 화폭이나 건축적인 공간 대신 자연적으로 조성된 공간과 바위에 인간의 정신을 투사하여 조성하는 매우 독특한 표현기법이다. 즉 마애불은 산 속에 넓은 화폭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그 위에 작가가 새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 바위를 보면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부처의 형상을 찾아서 불상을 새기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감성이 바로 그 시대의 정신이고, 보편적인 감성일 것이다. 실재 마애불을 보면 바위의 자연적인 요철이나 균열 등을 절묘하게 신체의 요철이나 가사의 옷자락으로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 마애불을 새겨넣기 전부터 사람들은 현재의 마애불과 같은 형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때문에 역사 속 마애불은 인공적인 조형임에도 자연스럽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오려는 병아리가 더 잘 나올 수 있도록 어미닭이 알을 쪼아 깨트려 주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관계처럼 조각가는 바위 안에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부처가 바위 밖으로 더 잘 드러날 수 있도록 표면을 조금 다듬어준 것 같은 느낌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불이나 영암 월출산 마애불은 그러한 조형성을 잘 보여준다. 불상이 새겨지기 전부터 산 속에 우뚝 솟은 바위들은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 위에 지금과 같은 거대하고 강렬한 인상의 불상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마애불을 화폭에 담는 화가가 있다. 김천일(金千一, 1951~ ) 화백은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회화과에서 공부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목포에서 살았다. 목포는 산도 좋고 바다도 좋은 곳이었기 때문인지 그는 이 시대의 진경산수화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천일,‘월출산 마애여래좌상’, 2020.
실재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통일신라.

진경산수화가로서 마애불을 화폭에 담은 예로는 이미 김홍도라는 선구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그가 금강산을 화폭에 담으며 그렸던 ‘묘길상’이나 ‘삼불암’은 지금은 쉽게 갈 수는 없지만 사진으로나마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롭다. 어쩌면 진경을 그리는 화가로서 자연 속 마애불 역시 당연히 소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마애불에 굳이 관심이 없었다면 이처럼 근경에서 마애불을 담아낸 구도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애불을 진경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 자체가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천일 화백 역시 마찬가지로 진경 화가로서 대둔산이나 월출산 풍광의 하나로 마애불을 담아낸 것이지만, 작품 속 마애불은 풍광의 한 부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마애불이 그 주인공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김천일 화백은 진경산수화가이지만 원래의 전공은 인물화였다고 한다. 때문에 진경 속 마애불을 그리면서도 마애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인물로 보고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이 마애불을 담아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마애불은 조각으로서의 마애불을 넘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김천일 화백의 시각을 통해 김홍도가 그린 금강산 마애불들이 왜 사진상으로 보는 실재의 마애불과는 달랐는지 그러면서도 같아 보였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김홍도나 김천일 화백이나 바위조각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마치 마애불을 새긴 조각가들이 그 바위 안에서 발견한 살아있는 부처, 나아가 그들의 예술적 구상 속에 떠오른 부처의 이데아 그 자체를 탐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기법으로 제작한 쪽빛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쪽빛은 염료로는 많이 사용되지만, 회화용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을 독자적으로 개량해 마치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처럼 김천일 화백만의 블루로 탄생했다. 원래는 목포의 바다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색을 추구하다 만들게 된 색이었는데 묘하게도 산을 표현하는데도, 바위를 표현하는데도 잘 어울렸다고 한다. 가히 모든 것을 품은 색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천일 화백의 마애불이 원래의 마애불적인 속성을 모두 버리고 상상 속의 부처만을 그려냈다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그 기반은 진경산수화에 있으므로 마애불의 속성도 그대로 화폭에 담겨있다. 예를 들어 월출산 마애불의 바위 표현을 보면, 작가가 이 바위를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 그의 화실에는 큰 화강암 돌덩이 하나가 놓여있다. 진경산수라고 하면 우선 산과 나무, 계곡 등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한국은 화강암산이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그 바위에 대한 묘사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나무나 폭포 등은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여하간 나무나 폭포임을 알 수 있지만, 화강암처럼 언뜻 밋밋한 대상을 화강암답게 그린다는 것은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천일 화백은 그렇게 화강암을 곁에 두고 그려보며 그 속성을 연구한다고 한다. 이를 알고 그의 작품 속 화강암을 들여다보니 삼라만상이 그 안에 담겨있는 듯하다. 물론 그 바위의 속성은 미술에서 전통적으로 영원성을 상징했고, 김천일 화백의 그림 속 바위 역시 그림 속 부처의 영원성을 담보해주고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김천일 화백의 작업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가들이 바위에 집어넣었던 당시 사람들의 시대정신을 이 시대에 도로 꺼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각가의 결과물인 마애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각가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가 이 바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엿보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현대인들이 떠올렸을 부처의 미감도 더해져 실제와 같은 듯 다르게 재해석된 마애불이 탄생된 셈이다. 인상, 작가, 작품, 그리고 재해석, 과연 어느 것이 실제일까. 진경이 의미하는 바의 깊이와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78호 / 2021년 3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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