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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바다를 품은 전혁림 : 소리로 법해(法海)를 그리다

기자명 주수완

민화 ·불화를 스승 삼아 마음까지 그림에 담다

그림에 대한 꿈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자신만의 화풍  확립
화집과 선배들 그림으로  공부…거장 화가들과도 활발히 교류
뚜렷한  색과 추상적인 그림으로 볼 수 없는 경계까지 그려내

전혁림 ‘사원으로부터’, 2005년, 250×168㎝(왼쪽). 사당을 한폭의 그림에 압축한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감모여재도’(오른쪽).
전혁림 ‘사원으로부터’, 2005년, 250×168㎝(왼쪽). 사당을 한폭의 그림에 압축한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감모여재도’(오른쪽).
전혁림 ‘새 만다라’2006년(왼쪽), 이영미술관 소장,  불국사 대웅전 천장 우물반자 단청(오른쪽).
전혁림 ‘새 만다라’2006년(왼쪽), 이영미술관 소장, 불국사 대웅전 천장 우물반자 단청(오른쪽).

서양화가 전혁림(全爀林, 1916~2010)은 통영에서 태어났다. 1930년 통영수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졸업 후 진남금융조합에 취업하면서 그림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대한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1938년 부산미술전람회에서 ‘신화적 해변’ ‘누드’ ‘월광’을 출품해 입선했다.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는데 주로 일본에서 건너온 당시 세계 화단을 소개한 화집과 책을 보며 연구했다. 잠시 아마추어 일본인 화가로부터 강습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화집과 선배 화가들의 그림이 스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특히 일본의 ‘미술수첩’과 미국의 ‘아트 인 아메리카’를 평생 구독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활동했으며, 1947년에는 양달성, 우신출 등과 경남미술연구회를 만들어 교류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오래 가지 못하고 해체됐다. 1949년에는 1회 국전에 ‘정물’을 출품해 입선하는 성과도 거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가 활동을 이어갔는데, 피난지 부산이 당시 한국의 중심이 됐던 만큼 피난 기간 동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1952년에는 부산 밀다원 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해 호심다방에서는 이중섭과 2인전을 열었으며 김환기와도 교유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이어갔다. 1953년 다시금 국전에 ‘늪’을 출품해 문교부장관상을 받았고 이후 1962년까지 꾸준히 국전에 출품해 입선과 특선에 올랐으나 이후에는 국전에 실망하고 출품하지 않았다. 1956년부터 62년까지는 부산의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렸는데 처음에는 생계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후 도예작품을 창작하는데로 이어져 시야를 넓히는 역할도 했다. 

1977년 부산을 떠나 다시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작고할 때까지 활동했다. 그리고 1979년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해 소개하는 ‘계간미술’에서 그를 다루면서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화집과 책으로 그림을 독학하고, 통영 출신의 저명한 문인 및 부산에서의 거장 화가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 독보적인 예술가였다. 대체로 그의 화풍은 색면추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색조는 오방색을 바탕에 두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응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평소 화보 외에 한국의 민화와 불화가 자신의 스승이었음을 밝히고는 했다.

그러나 오방색이 한국 고유의 창작은 아니기 때문에 단지 오방색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적인 화가로 불릴 수는 없다. 오방색은 기본적으로는 동양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한 기본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오방색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따라 한국적인 전통이 드러나게 마련일 것이다. 앞서 다루었던 박생광 화백 역시 오방색을 바탕에 둔 화가이지만, 전혁림의 오방색과는 다르다. 박생광은 사실적인 대상을 오방색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콜라주 하듯 화면에 유기적으로 엮어놓은 반면, 전혁림의 화풍은 추상적 성격이 더 강하고 색과 색의 경계가 더 뚜렷해 차분한 인상을 준다. 박생광이 색으로 역동성을 드러냈다면, 전혁림은 색으로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어낸 것 같다.

불교를 소재로 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사원으로부터’(2005)이다. 앞서 그려진 ‘사원(궁)’(1992)과 유사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원(궁)’이 전통건축과 그 위의 단청을 해체해 재구성한 것이 비교적 뚜렷이 보이는 반면, ‘사원으로부터’는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구도를 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것을 그린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찾을 수 없었기에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이렇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마치 학을 형상화한 듯한 새의 모습이 화면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더불어 반대편에는 물고기로 생각되는 형태가 역시 오방색으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동물을 넣은 것에서 마치 불교의 장엄악기인 범종, 북, 목어, 운판 중에서 목어와 운판이 각각 바다와 하늘의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한 악기라는 점이 연상된다. 그렇다면 혹시 화면 중앙의 건물을 해체한 듯한 구조는 사찰에서 이러한 악기들을 걸어놓는 우화루, 보제루 등으로 불리는 누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면 그 안의 태극문양 같은 형태는 범종으로도 볼 수 있겠다. 범종이 지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악기라면 결국 하늘, 땅, 바다의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러한 장엄구들이 울려퍼지면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형상을 시각화한 것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가운데 태극문양을 감싼 둥근 원들은 범종을 칠 때 소리가 공명을 이루는 것을 표현한 듯 하다. 결국 그의 ‘사원으로부터’는 민화풍의 ‘감모여재도’가 사당의 축소판인 것처럼 그 자체로 사찰의 건축과 그 안에서의 법문을 작게 압축한 그림이라 하겠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주문으로 청와대에 걸리기 위해 그려진 ‘통영항’ 앞에 섰을 때의 강렬한 느낌이 다시금 떠오른다. 코발트빛으로 고향 통영 바다를 그려내면서 화가는 통영항을 감싼 역동적인 소리까지 담아낸 것 같다. 갈매기 우는 소리, 뱃고동 소리 그리고 파도 소리까지 더해 바다의 냄새가 느껴진다. 같은 코발트 색이지만 미묘한 톤의 변화와 그 안의 배들의 자유분방한 듯하면서도 정연한 배치는 정적인 듯하면서도 역동적이다. 형태는 정적이지만 안에 소리를 담아내 역동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새 만다라’ 역시 불교적 성격을 담고 있다. 법당 천장의 우물반자에 그려진 단청 문양을 바탕에 두었으나 제목처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됐다. 만약 ‘새 만다라’가 실제 법당의 천장에 그려졌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마치 중국 돈황 막고굴의 가장 오래된 벽화들인 북량이나 북위시대의 강렬한 채색벽화를 연상시키는 색채와 형태는 전혁림 화백이 단순히 오방색의 색채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뿌리깊은 역사까지 읽어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76호 / 2021년 3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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